1904년 美 밀사단으로 日 침략 고발
학위 취득 과정 밟으며 독립 강연회
1910년 귀국…서울 YMCA 학감 맡아
1912년 日 '105인 사건' 벌이자 망명
이듬해 하와이 한인기독학원장 맡아
이후 교육·종교·정치·언론 분야 주도
임정 대통령 추대…'구미위원부' 활동
38세 장년의 이승만이 일제강점기 해외로 망명해 정착한 곳은 하와이였다. 그가 호놀룰루에 도착한 1913년 2월3일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32년간 하와이는 그의 활동의 주 근거지가 됐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교육, 종교, 외교적인 차원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했는데 한인기독학원, 한인기독교회, 대한인교민단·대한인동지회는 바로 그 기반이 된 조직이다.
이승만(1875~1965)은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과 서당 훈장의 외동딸인 어머니 김해 김씨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1877년 서울로 이사하여 양녕대군의 종손인 이근수의 사숙(私塾) 도동(桃洞)서당에서 과거를 목표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다. 당시 그의 집이 도동서당이 있던 우수현(雩守峴, 지금의 힐튼호텔 근처) 남녘에 자리했기에 그는 아호(雅號)를 우남이라 지었다.
청일전쟁 발발 후 실시된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1895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개설한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이 학당에서 기독교 위주의 정규 교육을 받는 한편 갑신정변 가담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서재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서재필의 특별 연속 강연과 학내 토론 단체인 협성회(協成會)를 통해 서양의 근대 시민사회와 조선 왕조의 정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1899년 박영효 쿠데타 음모 사건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됐다가 두 차례 특사를 받고 1904년 출옥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에 휘말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시점이었다. 고종에게 신임을 받고 있던 민영환과 한규설은 미국에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영어에 능통했던 이승만을 밀파했다. 이때 처음 태평양을 횡단해 1904년 11월29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이후 미국에 머물면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 기사를 신문에 게재하고, 미 국무장관 및 미 대통령(루즈벨트) 면담을 통해 한국 독립 보존 협조를 요청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옥중에서 탈고했던 <독립정신>(초판본)을 발간하고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교육적 이상도 실현해 나갔다. 아울러 교회와 YMCA를 찾아다니며 140회 이상 한국의 독립에 관련된 설교와 강연을 이어갔다.
1910년 조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그가 가진 교육적 신념 구현을 위해 서울 YMCA의 학감(學監)을 맡아 기독교 청년운동과 교육에 전념했지만, 1912년 망명길에 올랐다. 소위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을 통해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세력을 제거하려는 움직임 속에 이승만은 미국에서 열리는 감리교 총회에 한국 대표로 출국함으로써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1913년 초 하와이로 망명한 그는 호놀룰루를 근거로 한인기독학원 원장, 한인기독교회의 창립자, 선교부장, 그리고 태평양잡지(1930년대 말 '태평양주보'로 개편)의 주필과 발행인으로서 한인 교포 사회의 지도자 역할을 담당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하와이에서 펼쳤던 이승만의 민족교육 열망은 광복 후 고국에서 재구현되어 1954년 국책대학으로서의 '인하공과대학' 설립을 주도했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하여 맨 먼저 시작한 사업도 이민자 자녀들의 교육이었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자녀 교육을 위하여 1906년 9월 한인기숙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13년 그 교장으로 취임하여 '한인중앙학교'로 발전시키고, “한인의 학교는 한인의 힘으로 자립하여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미국 감리교 교단을 떠나 교포들의 후원을 얻어 별도로 1916년 3월 여학생 기숙사에 모여든 73명의 여학생을 중심으로 '한인여자성경학원'이라는 본격적인 여학교를 발족시켰다. 그 후 1918년 9월 이 여학교를 남녀 공학의 '한인기독학원'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자기중심의 독립된 '한인기독교회'도 창설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 그는 청소년 교육에 주력하면서 잡지 발간과 새 교회 설립 등 교육, 종교, 정치, 언론의 모든 분야에서 한인 지도자가 됐다. 그러나 한인 교포들의 중심이었던 '국민회'의 두 지도자, 이승만과 박용만은 고국의 독립을 추진하는 방법론에서 외교와 무장 투쟁이라는 노선의 차이가 현격했고, 성품에서도 차이가 있어 이들을 중심으로 반목과 갈등이 생겨나 1910년대 후반 하와이 한인 사회는 분열했다.
한편, 이승만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한국에서 3·1운동이 터지자 해외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19년 3월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된 노령임시정부의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4월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 9월6일 상해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각각 추대됐다. 따라서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이었던 그는 주로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 머물면서 그곳에 설치된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 하와이에서 '국민회'를 통해 활동했던 이승만은 하와이 교포들의 힘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 유지하기 위해 '동지회'를 조직했다. 1924년 '종신 총재'로 추대된 그는 동지회 활동을 위한 기금 조달 목적과 동시에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된 노령화된 한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1925년 3월 '동지식산주식회사'를 조직하고 하와이섬(빅 아일랜드)에서 숯가마를 운영하면서 그들을 모아 이상촌을 건립하려 했다. 그가 1929년 호놀룰루에 개설했던 '한인 양로원'도 같은 맥락에서 평가된다.
1913년 38세에 하와이로 망명했던 장년 이승만은 32년 동안 기독교를 바탕으로 외교를 통한 조국의 독립과 민족교육에의 열망을 실현하고자 했다. 1945년 70 성상에 이르러 광복된 조국에 돌아와서도 그 신념은 이어졌고, 그 결과가 인천에 민족대학이자 국책대학이었던 인하공대 설립자로서 창학 70년의 역사에 남았다.
/강옥엽 인천시사편찬위원·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이 대통령, 한국 발전 위해 인하공대 설립”
[인터뷰] 김현태 한일루브텍 회장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당시 문맹률은 80%에 달했고 고등교육 이수자는 0.2%에 불과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척박했던 문맹률을 20% 정도로 낮춰 인재 육영의 교육 기반을 다진 선도적인 교육 리더였습니다.”
김현태 한일루브텍 회장은 “이 대통령은 건국 당시 어려운 국정 운영에서도 '교육입국론'을 주장하고 초등 의무교육에 국가 예산의 20%를 과감하게 투입한 교육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1957년 3월 이 대통령은 생일 축하금으로 '우남장학회'를 설립해 당시 고등학생, 대학생에게 지급했다. 김 회장은 인하공대 4회(57학번) 입학생으로 이 대통령의 육영 의지를 잇고자 지난 2012년 1월 인하대동문장학회에 '우남이승만박사장학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인하대총동창회 이승만 장학금은 위탁금 3억원을 기반으로 현재까지 99명에게 1억6500여만원이 지급됐다.
그는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불편한 진실> <이승만박사의 반공정신과 대한민국 건국> <이승만박사의 교육입국론> 등을 집필 출간해 후배 재학생들에게 보급했다. “우남장학생 선발 면접 과정에서 대학 설립자 이승만 박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진 일부 후배 재학생들의 인식도 관련 책자를 발간하게 된 하나의 동기였다”고 밝혔다.
그는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랜 세월 미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는데 일찍이 미국의 부강이 공업 산업이라는 점을 체험한 선각자였다”면서 “당시 후진 한국의 발전을 위해 미 MIT와 같은 공과대학의 필요성을 직감했고, 동양의 MIT로서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현경사회복지회를 운영하면서 개인적으로 인하대에 현경사회복지회 우남이승만박사장학생도 매해 선발해 왔다. 장학생 선발 기준에는 '우리 대학(인하대) 설립자 우남 이승만 박사의 교육입국에 대한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신념과 애국심, 국가관이 투철한 학생'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또 지난 7월에는 인하대에 별도 장학금 1억원을 기부하는 등 현재까지 34억여원의 대학 발전 기금 등을 기탁했다.
2018년 국민교육발전 유공 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인하대 본관 중강당은 '현경홀', 인하대 창업지원단 건물은 '김현태인하드림센터'로 명명돼 있다.
/김형수 주필 khs@incheonilbo.com
/인하대학교 총동창회·인천일보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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