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와 꽃피운 대학…동포들과 꽃피울 인천

 

1903년 호놀룰루항 86명 첫 공식 이민
고된 노동 속 민족 교육·독립운동 지원
'모국 공대 설립'에 학원 매각 대금 쾌척

 

사할린 귀국자 가장 많이 포용한 인천
해외 한인 관련 부처 '재외동포청' 유치

 

조국부강·공업입국 창학이념 인하대
과학대국 위해 두려움 없이 도전할 때

1883년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한 인천은 개항 도시로 변모했다. 개항과 더불어 유입된 신문물과 신종교는 인천 사회와 문화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모든 것이 인천으로 들어와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또 인천은 한반도의 산물이 모여 세계로 나간 집산지였다. 당시 인천사람들은 한반도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더 높았다. 이는 1902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갤릭호에 오른 이민 102명 중 인천사람이 86명에 달했다는 것에서 증명되듯 초기 하와이 이민에서 인천사람들의 역할은 매우 컸다. 두려움 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던 사람들의 선택 중 하나가 이민이었기 때문이다.

▲ 1955년 10월 하와이 원로 동포들이 인하대를 방문했다. /사진제공=인하대총동창회
▲ 1955년 10월 하와이 원로 동포들이 인하대를 방문했다. /사진제공=인하대총동창회

인천사람들의 도전과 용기, '포와'로 가는 길

1902년 12월 22일 아침, 동서개발회사에 모인 121명의 이민 선조는 인천해관에서 출국심사를 마치고 월미도 해상에 정박 중인 겐카이마루에 올랐다. 이들은 오후 2시 제물포항을 떠나 무지개 꿈의 포와(布哇, 하와이)를 향해 긴 여정을 시작했다.

목포와 부산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 이민자 중 신체검사에서 19명이 탈락했다. 갤릭호에 승선한 102명은 고베, 요코하마를 거쳐 수평선 너머 끝없이 이어진 바다를 건너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선상 신체검사에서 16명이 또 탈락해 최종 86명만이 하와이 땅을 밟게 됐다. 이들은 오아후섬 와이알루아 농장에 정착했다. 우리 민족 첫 공식 이민의 여정이다. 하와이 이민이 금지된 1905년까지 64회에 걸쳐 7415명이 이주했다.

동포들은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점심시간 30분을 제외한 10시간 동안 사탕수수밭에 물을 대고 사탕수수를 베는 일, 베어진 사탕수수를 묶어 마차나 기차에 올리는 일 등을 했다. 고된 이민 생활을 보듬어 안은 곳은 교회였다. 다른 민족보다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는 한글과 민족성을 가르치는 학교로서의 기능을 발휘했다. 한인기숙학원으로 출발한 민족교육은 1913년 이승만의 하와이 도착과 함께 한인중앙학원으로 명칭을 바꾸어 여성 교육의 길을 열었다. 이승만은 교회의 재정에서도 독립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한인기독교회를 세우고, 한인여학원을 개편한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했다. 푸우누이에서 카이무키로, 다시 칼리히 언덕에 새 교사를 마련한 한인기독학원은 1947년 폐교할 때까지 한글과 민족성을 가르치는 민족교육의 중심이었다.

▲ 121년 전 제물포항을 출발한 첫 이민자들은 갤릭호에 몸을 싣고 1903년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 7번 선창에 도착해 이민 생활의 시작을 알렸다. /인천일보 DB
▲ 121년 전 제물포항을 출발한 첫 이민자들은 갤릭호에 몸을 싣고 1903년 1월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 7번 선창에 도착해 이민 생활의 시작을 알렸다. /인천일보 DB

이승만, 이민 50주년 맞아 공과대학 설립 피력

사탕수수 농장에서 동포들은 10명 이상이 모여 동회를 조직하고 자치적으로 운영했다. 동회들은 한인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모국의 상황에 불안을 느낀 동포들은 24개 한인단체를 통합하여 하와이 한인합성협회를 발족했다. 한인합성협회는 1909년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와 통합하여 국민회를 만들었다. 이듬해 대동보국회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북미, 멕시코, 쿠바, 하와이, 시베리아 등지에 지방총회를 둔 대한인국민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할 때까지 동포들의 권익을 보호할 뿐 아니라 모국의 주권 회복을 위해 활동했다.

그들은 노동의 대가로 받은 17달러의 월급에서 1달러 이상을 애국금, 혈성금, 독립의연금 등 다양한 이름의 독립자금으로 모아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독립전쟁을 지원했다. 또 일본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동포들은 모국과 민족정신을 이어갔다.

인하공과대학은 모국과 이어지고자 했던 동포들의 염원을 상징한다. 민족 교육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한 한인기독학원을 매각하기로 한 동포들은 대한민국이 공업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공과대학 설립을 기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사에서 공과대학 설립을 피력했다. 하와이와 인천 사이에 미국과 연락하는 우의 상통의 길을 만들기 위해 교명을 인하라 하고, 인천시가 12만5000평의 교지를 제공했다. 인하공과대학은 1954년 중앙정부와 국민 성금으로 설립비용을 마련하여 개교했다. 우리나라 공업과 기술 방면을 창출한다는 창학 이념을 가진 인하공과대학은 1902년 하와이로 간 동포들의 애국심을 영구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인하공과대학은 재외동포와 국내동포의 종합선물이며, 이민 역사가 모국으로 귀환한 상징이 됐다. 750만 재외동포는 인천에 첫발을 디디면서 모국의 문을 열고, 다시 인천의 땅을 밟고 거주국으로 돌아간다. 새로운 이민자의 삶을 인천에서 꿈꾸며, 모국에서의 코리안 드림이 시작되는 그곳이 바로 인천이다.

▲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청'이 인천 연수구 송도동 송도부영타워에 개청했다./인천일보 DB
▲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청'이 인천 연수구 송도동 송도부영타워에 개청했다./인천일보 DB

인하인, 재외동포와 과학대국 미래 선도해야

한반도 전역에서 유입된 모든 이들이 힘을 모아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선도하여 온 이주민의 도시 인천은 모든 이에게 기회의 땅이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역동성과 포용력을 품은 도시이다. 인천은 이미 재외동포를 포용했다. 사할린 영주귀국자들이 국내에 둥지를 틀 때 인천은 단일 도시로는 가장 많은 동포를 끌어안았다. 1만명의 재러·재CIS 동포가 지역주민과 상생하며 모범적으로 모국에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글로벌시티에는 모국에서의 여생을 보내기를 희망하는 재외동포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다.

지난 6월5일 재외동포청이 인천에 개청했다. 하와이와 멕시코로 이민자를 떠나보낸 진출 이민사에 모국을 찾은 동포를 포용하는 유입 이민사가 더해졌다. 배웅하였던 동포들을 다시 마중하게 된 인천은 한민족의 전체 이민사를 상징하는 도시가 됐다. 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술, 인재, 포용이 필요하다고 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에는 기술과 인재는 넘쳐나고 있지만, 포용에는 의문점이 있다. 이주민의 도시로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 인천의 상징인 포용은 배웅하였던 재외동포들을 다시 인천에서 마중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인천사람들의 덕목이다.

한반도 전역에서 모인 이주민과 함께 인천은 인구 300만의 대한민국 3대 도시로 성장했다. 재외동포청을 품은 인천은 750만의 해외 시민과 함께 인구 1000만의 도시가 됐다. 개항 도시로 발전하며 민족의 첫 공식 이민을 선도했던 인천은 인천국제공항과 경제자유구역을 품으면서 전 세계 곳곳에서 한민족의 자긍심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이민 사회를 형성해 온 해외 시민들과 함께 시민이 행복한 세계 초일류도시 건설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함께 써 내려가게 됐다.

창학 70년을 맞는 인하대학교는 민족 첫 공식 이민을 개척한 하와이 동포의 발원, 부지를 제공한 인천시, 정부와 국민이 참여한 설립비용 조성 등 종합선물과도 같은 설립과정을 지녔다. 조국부강·공업입국의 창학이념을 바탕으로 조국 발전에 힘써온 인하대학교는 인천시, 재외동포청과 함께 과학대국의 길을 선도해 나가야 할 때다. 민간 최초로 인천 송도 갯벌에서 창공을 향해 로켓을 쏘아 올렸던 인하의 기백처럼, 두려움 없이 새로운 삶을 개척했던 동포들과 함께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전정신을 이어가길 바란다.

▲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인터뷰] 아만다 장 하와이 한인문화회관 재단 이사장

고국 방문 일번지 인천 역사 간직한 '인하대'

▲ 아만다 장 하와이 한인문화회관 재단 이사장
▲ 아만다 장 하와이 한인문화회관 재단 이사장

“이제 인천은 750만 해외 동포들을 맞고 환영하는데 선두주자로서 역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아만다 장(Amanda S. Chang) 하와이 한인문화회관 재단 이사장이 지난 12일 인하대학교에서 특별강연을 했다. 강연 후 아만다 장은 인천일보와 인터뷰를 통해 인하대와 인천, 하와이 간 교류 증진 확대와 재외동포청의 역할에 관해 조언했다.

아만다 장은 부모를 따라 하와이에 정착한 이민자이다. 하와이주립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로스쿨을 졸업하고 현재는 이민법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하와이 이승만회 이사, 하와이 한인변호사협회 이사 등을 맡으며 사회봉사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아만다 장은 인천과 하와이는 이민의 역사와 인하대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인하대는 하와이에 40년 동안 거주한 나에게 특별한 곳입니다. 인하대는 30년간 하와이에서 독립운동과 교육자로 활동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한인기독학원 부지를 판매한 돈이 종잣돈이 되어 설립된 대학이기도 합니다. 인하대 개교 70주년은 역사적으로 뜻깊은 일이며, 인하대와 하와이 교민 간 관계가 지속하여야 할 이유입니다.”

하와이 교민과 단체들은 재외동포청 인천 유치를 위해 지지 선언을 보내는 등 큰 역할을 했다.

“많은 하와이 한인 동포들과 단체들이 인천에 재외동포청 유치를 위하여 애를 썼습니다. 이제 인천은 재외동포청 개청으로 재외동포들의 고국 방문 일번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천은 해외동포들을 맞고 환영하는데 선두주자로서 역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재외동포도 한국인이고, 재외동포가 사는 곳이 한국 영토라는 사고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인천은 한인의 세계화, 글로벌 한국인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는 인천과 인하대, 하와이의 교류가 더 확대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천과 하와이, 인하대는 이민 역사로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1902년 121명의 한국인이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해외 첫 이민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와이의 초기 이민자의 절반 이상이 인천 내리교회 기독교도들이었습니다.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이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을 위해 기부했습니다. 독립운동 정신은 인하대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인천과 하와이의 특별한 이민 역사 그리고 독립운동 역사, 인하대 설립 역사를 인천시민, 하와이 한국인 후세대와 현지인, 하와이를 방문하는 전 세계인에게 알려야 합니다. 이런 중요한 근대 역사 알리기에 인천과 인하대, 하와이 교민들이 힘을 보태는 것이 교류의 초점이어야 합니다.”

/조혁신 논설실장 mrpen@incheonilbo.com

/인하대학교 총동창회·인천일보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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