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타향 이민 선조 애국애족 정신 뿌리내리다

 

민족교육 선도 이승만, 15만달러 쾌척
거족적인 모금 덕 '인하공과대학' 개교

 

공업화 주역 과학기술 인력 양성 목표  
경인공업지대 배후 지역 인천에 '둥지'

 

4·19 혁명 이후 정치적 시련에 휘말려
1968년 한진상사 인수로 성장 디딤돌

▲ 인하대학교 전경.
▲ 인하대학교 전경.

인하대학교는 2024년 4월24일, 개교 70주년을 맞이한다. 인하대는 한국전쟁 정전 다음해인 1954년 '인하공과대학'으로 출범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설립한 인하대는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의 재단 인수를 거쳐 지난 70년 동안 놀라운 고등교육의 금자탑을 쌓았다. 현재까지 배출된 인하동문은 20만명에 이른다. 그들은 초창기 조국부강, 공업입국에 헌신한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중추 자원이었고, 국가 경제의 원동력이었다.

특히 인하대 창학의 한 가운데에는 하와이 이민 선조들의 애국애족 의지가 담겼다. 그래서 인하대는 하와이 이민이 출발한 인천에 숙명처럼 자리 잡게 됐다. 인천과 하와이, 그리고 인하대는 대한민국 영욕의 역사 속에 공존하는 공동체다. 교명도 '인천'과 '하와이'의 첫 음절로 지었다. 하지만 고등교육의 기능과 역할이 지역 발전과 긴밀하게 연계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하대의 역사와 지역성, 정체성을 공유하기엔 부족한 면이 많았다.

인하대는 광복과 미군정기 이후 정부 주도로 창학했지만 1960년 이승만 정권의 퇴진에 따라 한 때 심각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1968년 한진그룹의 학교법인 인하학원(재단) 인수는 제2의 창학을 기약하는 새로운 도약의 시점이 됐다.

내년 인하대 개교 70주년을 앞두고 인천일보와 인하대총동창회는 인하대의 역사와 정체성, 성장과 발전, 미래 비전 등을 지역사회와 공유할 공동기획을 격주로 연재한다. 지역사회와 인하대의 앙상블이 인천시민의 각별한 자긍심으로 기록되길 바란다.

▲ 인하공과대학 개교 당시 대학 입구에 세운 대형 입간판.

하와이 이주 50주년 사업으로 태동

이승만 피란정부 주도로 설립 추진

일제시대 중등교육 수준의 사립 전문학교 외에 대학은 관립 경성제국대학이 유일했다. 광복 후 미군정 시기 정부의 교육 예산은 매우 열악한 수준이어서 고등교육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대중적인 초등교육에 집중해야 할 여건이었다. 따라서 미군정기는 정치적 통제 아래 사립 고등교육의 문호가 널리 열리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시기 문교당국의 인가를 받은 다수의 사립학교가 4년제 사립대학으로 승격되고 신설됐다. 1946년 8월15일 이화여자대학교, 연희대학교, 고려대학교가 대한민국 최초의 종합대학으로 승격됐다. 1948년 미군정기까지 대부분의 사립대학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부지와 교사(校舍), 적산 불하, 농지 후원, 대민 모금, 미국 재단들의 원조 등 다각적인 자원을 확보해 대학을 세운 사례이다.

미군정기 이후 경제난을 겪으면서 정부의 국공립대학 지원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던 점도 사학 설립을 부추긴 이유일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립대학 설립 주체는 일제하에서 대학을 나온 전문 직종의 사회적 지위를 얻은 집단이었다. 하지만 인하대의 창학은 우남 이승만 박사의 확고한 교육 의지에 따른 정부 주도였다. 이 박사는 하와이에서 운영했던 한인기독학원의 매각 대금 15만불을 인하공과대학 설립의 종잣돈으로 내놨다.

하와이 이민 50년이 되는 1952년 12월 중순은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시기였다. 부산 피란정부를 이끈 이승만 대통령은 김법린 문교부장관에게 인하공과대학 설립을 지시하고, 이듬해 3월 설립기성위원회가 구성됐다. 국무총리가 고문을 맡고 국무위원, 국무원 처장 등 47명으로 구성된 설립기성위원회의 위원장에 문교부장관이 임명됐다. 1954년 2월 허가를 맡은 재단법인 인하학원의 대표는 이승만 대통령 비설실장을 역임한 이기붕 부통령이 선임됐다.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인천시는 12만5173평을 설립기성위원회에 기부했다.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매각 대금 '종잣돈'

인천시 부지 제공, 인천-하와이 첫 음 '인하'

1902년 12월22일, 대한민국 첫 공식이민으로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이민이 출발했다. 121명의 선조들은 제물포항 선창에서 겐카이마루(玄海丸)에 몸을 실었다. 일본 고베를 거쳐 갤릭(Gaelic)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항 7번 선창에 도착해 입국허가를 받은 최초 이민은 86명으로 대부분 인천 출신이다. 이민이 제한된 1905년 7415명이 하와이에 진출했다. 첫 이민 10년 후인 1913년 2월 이승만은 하와이로 진출해 교육, 종교, 외교적 차원에서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이보다 수개월 전 하와이에 들어온 박용만의 군사 노선은 이승만과의 분쟁에서 주도권을 잃었다. 하와이는 이승만의 교육·민족·독립 운동의 전초기지였다.

1947년까지 하와이 동포들의 성원으로 우남이 운영한 한인기독학원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고국에 이민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교육기관 설립으로 이어지게 됐다. 인하대가 인천에 세워진 원인은 인천이 하와이 이민의 출발지라는 상징성과 전쟁 후인 1950년대 초반 시급한 공업화 정책에 따른 과학기술 인력 양성을 위해서는 경인공업지대의 배후인 인천이 적지였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발적인 대학 설립기금 조성 촉구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기금 조성 6개 반을 구성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각 부의 차관급과 서울대·연세대 총장, 지역 국회의원, 금융계, 전매업자, 양조계, 상·공·수산·광·전·무역·출판·인쇄업계, UNCAC, UNKRA, 한미협회, 외국기관, 하와이 교포가 참여하고 각 소속 관공서의 봉급 5%를 갹출하는 등 거족적인 모금 활동이었다. 인하대의 설립은 국가적 과제였던 셈이다.

정부 주도의 대학 설립 과정에도 불구하고 인하대는 사립대학으로 출범했다. 1952년 정부는 1도 1교의 국공립대학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경기도 인천에는 국공립대학을 두지 않고 사립 학교법인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하게 됐다. 정부 출연이 크게 작용했으나 하와이에서의 민족교육을 고국에서 새롭게 잇겠다는 이승만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는 아니었을까. 인하대의 설립은 하와이 이민사회의 민족교육 운동에 헌신한 이승만 박사의 완벽한 디아스포라의 귀환으로 평가되는 부분도 있다. 당시 사립대학은 국공립대학의 제약을 넘어서 국가 정책과 지원이 더 자유롭던 시대였다.

재학생 2만348명, 20만 인하동문 배출

4대 캠퍼스 조성 등 미래 청사진 펼쳐

인하공과대학은 1958년 재정이 어려워지자 유엔군 산하 경제조정관실의 지원을 받기 위해 2년제 종합직업학교로 개편하려는 위기를 맞았다. 자유당 정권에 기반한 인하대는 1960년 4·19 혁명을 계기로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5·16 쿠데타를 기점으로 자유당 인사로 구성됐던 재단 이사회는 완전히 해산되고, 5·16장학회가 재단 인수를 추진했지만 무산됐다. 1961년 9월 제정된 대학정비기준령에 따라 이승만이 국가정책적 성격으로 설치 지원했던 병기공학과, 원자력공학과는 폐과됐다.

인하공과대학은 1954년 개교 당시 금속·기계·광산·전기·조선·화학공학과 등 6개 학과 180명 정원으로 출발했다. 1968년 9월 한진상사주식회사 조중훈 사장(제12대 이사장)의 재단 인수는 인하대의 제2 창학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계기였다. 그동안 불안정한 학내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종합대학으로서의 성장의 기치를 준비하는 출발점이었다. 1959년 11월15일 2회 졸업생을 배출한 시기 인하공과대학동창회가 출범했다. 1회 124명의 졸업생 이후 현재 20만명의 동문을 배출했다.

지난해 대학 정보공시자료에 따르면 인하대 재학생은 대학, 대학원 등 2만348명(학부 1만7175명)이다. 매머드급 대학 규모이다. 인하대는 내년 개교 70주년을 기점으로 산·학·연·관 항공우주융합캠퍼스, 첨단기술 송도캠퍼스, 교육환경혁신 용현캠퍼스, 최첨단 김포메디컬캠퍼스 등 4대 캠퍼스 조성 등 교육·연구·국제화 인프라 구축을 위한 청사진을 펼친다. 국내 10위권, 글로벌 300 명문대학 진입, 상위 인재 영입, 취업률 제고, 산학협력 수입 초과 달성 등 웅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대학의 경쟁력은 지역사회와 국가의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인하대는 보편적 대학 설립 성격과는 구별되는 각별한 창학 의미를 지녔다. 하와이에서 펼친 우남 이승만 박사의 민족교육 철학을 실천한 결실이다. 인하대의 파란만장한 설립과 발전 과정, 그리고 미래를 풀어나가면서 인천과 하와이, 그리고 인하대학교의 숙명적인 역사와 정체성을 공유해 인천과 국가 발전의 시너지가 되길 기대한다.

▲ 김형수 주필
▲ 김형수 인천일보 주필

/김형수 인천일보 주필

/인하대학교 총동창회·인천일보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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