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황제 폐위 음모사건 연루 투옥
옥중서 민중 계몽·정치 개혁 의식 다져
'제국신문' 사설 통해 교육 중요성 강조
'미국흥학신법'서 만민·남녀 평등 주장
1913년 망명 후 하와이 한인 교육운동
한인중앙학원 원장 맡아 남녀 공학 운영
국권 회복 공헌할 인재 육성 위해 노력
민족교육 구현 이상 인하공대 창학 기반
국책 대학으로서 1954년 개교한 인하공대 설립을 주도했던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晚, 1875~1965)은 정치가 이전에 교육자였다. 그는 1905년 9월~1910년 7월에 걸쳐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의 학사 학위와 하버드대학의 석사 학위, 프린스턴대학의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승만의 삶과 꿈>의 저자 유영익은 “이승만은 국제법을 전공한 국제정치학자였고 만국공법의 대가였다. 일본과 중국에서 우리보다 많은 유학생을 구미에 파견했지만 그들 중 이 박사의 학력에 필적할 만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렇게 그 자신의 교육적 이력도 필적할 만한 것이지만, 그가 남긴 여러 글을 통해 그의 민족교육에 대한 소신과 교육 이념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하와이에 세웠던 한인기독학원의 운영과 교육 정책은 그의 교육 이념의 구현이었으며, 그것이 훗날 인하공대 설립의 바탕이 됐다.
이승만의 교육 이념은 어려서부터 낙동(현 서울 충무로 근처) 및 도동(남산 서쪽)서당에서 습득한 유교식 교육과 어머니의 불교적 종교 성향, 그 바탕 위에 배재학당에서 개신교와 신학문을 받아들이면서 확립됐다. 여기에 그의 내적인 사상체계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은 1899년~1904년 박영효(朴泳孝) 쿠데타 음모 사건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됐던 시기이다.
이승만은 1898년 11월 종 9품인 중추원(中樞院)의 자문 역할을 맡은 의관(議官)으로 선임된 후, 반역죄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의 신원운동에 앞장섰다가 투옥됐다. 당시 국내에 잠입한 박영효 일파의 고종(高宗) 황제 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된 정황과 탈옥까지 겹쳐 처음에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나 두 차례 특사를 받고 5년 7개월 동안 한성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 시기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독립정신>을 집필했다. 1910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에는 개화기에 형성된 그의 민중 계몽 의식과 정치 개혁 이상,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이후 내적으로 종교관의 변화와 더불어 동서양의 많은 서적을 탐독하고 논설을 기고하면서 책을 번역, 편찬했다. 그리고 옥중학교와 서적실을 개설하는 등 그의 교육 이념을 실천해 나갔다. 1903년 <제국신문>의 사설에 '대개 사람의 권리는 학문에서 생기나니 학문이 없으면 권리가 무엇인지 모를지라'라고 하여 교육은 민중의 권리를 자각케 한다고 보았다. 문명 부강국의 기반이 교육에 있다는 것을 파악한 그는 교육을 통해서 민중의 각성과 교화가 이루어진다고 인식했다. 특히, 그가 경험했던 기독교 교육을 통해 부국강병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를 실천하기 위해 상동교회 내 상동청년회에 학교를 설치했으며 개명진보를 위해서 백성을 기독교의 도(道)로 교화시키고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실시함을 주장했다.
아울러 만민이 평등하다는 전제로 신분제도는 철폐돼야 하고,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과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그가 옥중에서 쓴 <미국의 교육을 일으킨 신법(美國興學新法)>에서, '배움이란 사람이 반드시 다해야 할 직분이며 거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라며, '옛날에 여자들을 가르친 것은 그 공부를 깊이 하여 법률가나 신학자나 과학자와 같은 이름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다만, 문리를 밝게 깨우치고 베끼고 셈하는 것을 대략 통하여 집안을 지키고 자녀를 가르치는 계책으로 삼기를 바랐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의 교육은 대서원 이상에까지 이르렀으나 여자의 교육은 겨우 초동이나 중등교육으로 그치는데 지나지 않았다. 진실로 여자는 반드시 시집을 가야하고 큰 바깥일은 남자가 주관해야 하며 여자에게는 큰 재주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50년 전에 정세가 크게 변하여 국내에 여학교가 많이 생겼다. 남자학교에 비해 숫자가 더욱 많아졌고 정미(精美)함도 훨씬 더했다. 또 전문 분야를 다루는 여학교도 생겨나 남자가 배우는 모든 학문을 여자들도 배우지 않음이 없다. 뉴욕의 경우에는 여자에게 회화와 전보 등의 일을 가르치고 있는데 실로 천하의 좋은 제도이다'라고 하여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승만의 교육에 있어 남녀평등관은 곧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내세운 것으로 여성들 또한 동등한 직분을 가지며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를 주장했다. 특히, 이 자료를 통해 근대적 교육기관 설립의 중요성, 새로운 각급 학교 제도의 필요성, 교육에 있어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해 심각하게 느끼고 이를 바탕으로 옥중학교, 미국 유학, 서울 YMCA에서의 활동, 하와이에서의 초기 교육활동은 물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다음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남녀평등을 실현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이와 같은 신념은 하와이에서 교육이 필요한 여학생들에게 기숙사를 마련하며 여성 교육을 실시하게 된 바탕이 됐다.
이승만이 해외로 망명하여 정착한 곳은 하와이다. 그가 하와이에 도착한 1913년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하와이는 그의 활동의 주 근거지였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해 맨 먼저 시작한 사업도 이민자 자녀들의 교육이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자녀 교육을 위하여 1906년 9월 한인기숙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것은 하와이 감리교회의 산하에 놓여 있었다. 1913년 9월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우선 학교의 이름을 '하와이 군도에 있는 모든 한인(한글)학교의 중앙이 될 것'을 뜻하여 '한인중앙학교(Korea Central School)'로 바꾸었다. 이승만이 교장에 취임하자 학교는 급성장하여 불과 6개월 만에 학생 수가 32명에서 120명으로 증가했다. 전체 학생은 4개 학년으로 나뉘어 공부하였으며 교과 과목은 성경과 영어는 물론 한국어와 한문이 포함됐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거의 혁명적인 교육 방법인 남녀 공학 제도를 실시했다. 이승만이 한인중앙학원 원장에 취임하자 19명의 여학생이 공부를 하겠다고 자청해왔다. 이들 여학생을 위해 기숙사를 별도로 마련하였지만 교사와 교실 등의 문제로 그들을 중앙학원에 취학시켰다. 처음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부 미국인들까지도 상당히 반대하였지만 나중에는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인중앙학원 교장으로 복무한 지 3년 만에 감리교 선교부와 의견 차이로 그 자리를 사직했다.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한인학생들을 하와이 사회에 완전히 동화시켜 미국사람들로 만들려고 한 반면, 이승만은 한인 학생들에게 한국 말, 한국 역사, 한국 관습을 가르쳐 장차 한국의 국권 회복에 공헌할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도록 교육시키기를 원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민족교육에 대한 신념은 이후 한인여자학원을 '한인여자성경학원'(1916), 그리고 남녀 공학의 '한인기독학원'(1918)으로 확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이승만은 '한인기독학원'의 교육 지침을 네 가지로 설정하였는데 첫째, 교육과 기독교 지향의 학생 활동(To promote educational and religious activities), 둘째, 한국인의 주체성 확보(To retaining Korean Identity), 셋째, 젊은이들의 지도력 양성(To promote leadership among the young people), 넷째, 사회 교육의 추진(To promote social education)이었다. 이 네 가지 교육 지침은 결국 이승만의 교육 이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교육을 통해 이민사회에 잘 적응하면서 지도자로서도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국권 회복의 한 방법으로써 민족교육을 강조한 것이다.
훗날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못다 이룬 민족교육에의 열망과 교육 이념은 1950년대 광복된 조국에서 과학기술 개발과 기술자 양성이라는 시대적 과제 속에 인하공과대학 설립으로 구현됐다.
/강옥엽 인천시사편찬위원·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인하대학교 총동창회·인천일보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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