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뿌리내린 민족교육의 씨앗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하와이 동포들 한인기독학원 설립
고국 인재 키우는데 매각 대금 쾌척

[강옥엽 인천시사편찬위원]
이승만 대통령 과학기술교육 정책
이민 50주년 맞물려 인하공대 창학

[양윤모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정부 관리받는 사립재단 불안한 특성
'육영입국' 뜻 품은 조중훈 인수로 탈피
▲ 지난달 21일 인하대학교 본관 현경홀에서 열린 인하창학역사 학술심포지엄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 지난달 21일 인하대학교 본관 현경홀에서 열린 인하창학역사 학술심포지엄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인하대학교 개교 7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이 지난달 21일 인하대 본관 현경홀에서 열렸다.

인하대와 인하대총동창회가 주최한 이날 심포지엄에서 발제자들은 인하대가 하와이 이민자의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으로부터 뿌리를 내렸으며, 6·25 전쟁 이후 국가재건 및 과학기술 인재양성을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와 국민과 하와이 동포의 지원에 힘입어 개교하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인천은 ‘재외동포청’ 개청으로 한민족 공동체사회 구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에 인하대는 새로운 글로벌 인재육성을 위한 제2의 창학을 준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발제자로 나선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하와이 이민노동자들의 민족교육 열망과 실천’이라는 주제로 하와이와 인천, 인하대의 세 번에 걸친 인연을 소개하며 “한국인의 자주성 확보, 젊은이들의 지도력 양성 등을 위해 설립된 하와이 한인기독학원은 민족교육의 중심이 되었다”며 “한인기독학원을 모태로 인하공과대학을 개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 인하공과대학 설립을 위해 매각된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칼리히 캠퍼스./사진제공=한국이민사박물관
▲ 인하공과대학 설립을 위해 매각된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칼리히 캠퍼스. /사진제공=한국이민사박물관

이어 강옥엽 인천시사편찬위원은 ‘이승만 박사의 국책대학 설립 의지와 인하공대 창학’이라는 주제 발표에서 1954년 인하공과대학 설립 요인으로 “6·25전쟁 직후 국가재건을 위한 과학기술인 양성교육 필요성, 하와이 이민자들의 고국에서의 교육사업 의지, 이승만 대통령의 기술인재양성을 위한 공과대학 설립 의지”를 들었다.

양윤모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원은 ‘조중훈 박사의 인하학원 인수와 인하대학교 제2의 창학’이라는 주제 발표에서 “조중훈 인하대 재단 이사장이 1968년 인하공대를 인수하면서 이전 국·공립 재단이라는 이중 성격을 극복하며, 이후 1971년 종합대학으로 전환하여 발전하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 인하대 1회 졸업생 이종우(기계 54학번) 동문이 심포지엄 인사말에서 각별한 창학정신을 이어가자고 말했다./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 인하대 1회 졸업생 이종우(기계 54학번) 동문이 심포지엄 인사말에서 각별한 창학정신을 이어가자고 말했다./양진수 기자 photosmith@incheonilbo.com

토론에서 남종우(화공54) 동문은 “재단의 후원과 유능한 교수 확보가 필요하다”며 “세계적인 명문 사학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시대 변화 조류에 부응한 혁신적인 경영 쇄신책과 유능한 신임 교원 충원 방안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이어 서원경(무재81) 동문은 “인하대 미래 발전을 위해 지역사회, 하와이 교민 사회와 교류를 활성화해야 한다. 인하대 창학 역사, 이민사 등 학교 공동체 의식교육이 필요하다”며 “재단 이사회에 총동창회, 교수, 학생 대표 등을 이사진에 포함해야 학교 발전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홍동윤(국문86) 동문은 “학교 설립자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 등 대한민국 근대화 기틀을 마련한 정치적 업적을 재조명해야 한다”며 “이승만 대통령이 설립한 인하대만이 민족대학으로서 가치가 있다. 동문이 민족대학으로 인하대를 만들기 위한 논의와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류창호(사학87) 동문은 “인하대는 초기 창립 기록이 국가기록원, 미국 국립문서보관청 등 외부에 흩어져 있다”며 “인하대 창립 기록 및 역사, 로켓 발사 및 국산 2호 전자계산기 제작 등 학술적 업적을 시급히 아카이빙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유정복 인천시장은 축사를 통해 “인하대의 역사는 인천의 자랑이자 경쟁력이다. 인천이 발전하는 만큼 인하대가 발전할 것”이라며 “송도캠퍼스, 산학융합센터 등 인하대의 발전 계획이 모두 인천시와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길원 개교 70주년 기념사업 총괄준비위원장은 개회사에서 “인하대 역사를 되돌아보고 100년 비전과 정체성을 재확립하여 종합대학으로 발전하는 심포지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신한용 인하대총동창회장은 “인하대는 70년 역사를 넘어서 백년대계를 이루기 위해 동문 모두가 새로운 공감대를 만들어야 하며, 70년 동안 지녀온 대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며 “심포지엄이 인하 미래 100년을 준비하고 인하대 발전의 모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다음은 주제 발제 요약문.

 

▲하와이 이민노동자들의 민족교육 열망과 실천 - 김상렬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

▲ 김상렬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
▲ 김상렬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

낯선 땅에서 동포들을 보듬어 안은 곳이 교회였다. 교회는 동포들에 민족 정체성을 가르치는 학교로 기능했다. 민족교육에 대한 동포들의 열망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일찍 학교를 설립하게 했다. 1906년 미 감리교의 도움을 받아 한인기숙학원을 설립했다. 동포들은 학생 65명 전원을 기숙사에 입사시켜 민족교육을 시작했는데 이듬해 정식 인가를 받아 상급학교로 진학도 가능했다. 1913년 하와이로 온 이승만은 한인중앙학교로 개명하고 여학생을 받아들여 남녀공학의 학교로 만들었다.

미 감리교 친일 발언과 일본영사관의 재정지원은 동포들의 반발을 샀고, 여학생을 교육할 수 없다는 조항에 반발한 이승만은 동포들의 후원을 받아 한인여학원을 설립했다. 설립 비용 7700달러 중 미국인 후원은 200달러뿐이었다. 당시 하와이에 거주하던 21세 이상의 동포들이 각자 2달러 이상을 낸 셈이다. 이는 동포들이 독립된 민족교육을 얼마나 희망하였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인의 자주성 확보, 젊은이들의 지도력 양성 등을 위해 1918년 한인여학원 자산을 정리하여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하였다. 한인중앙학원의 폐교로 민족교육의 중심이 됐다.

1923년 칼리히에 새 교사를 지어 이전하였는데, 3만 달러가 모자랐다. 이에 학생 20명과 교사 3명으로 하와이학생고국방문단을 조직하여 7월2일부터 9월1일까지 국내 30여 도시를 방문하며 운동경기와 음악회,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2만5000여만 원을 모금했다. 국민은 하와이 동포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에 공감을 보냈다. 7월13일과 14일 인천을 방문하여 야구 경기와 음악 공연을 했다. 인천은 인구비례상 가장 큰 금액인 700여원을 기부하였다. 모국을 배우고자 했던 학생들에게 내리조선소년척후대의 독립 정신과 이우구락부의 전통음악을 전해주었다.

한인기독학원은 1938년부터 1947년까지 기숙사, 고아원, 양로원으로 사용했다. 학교 매각을 결정한 동포들은 대한민국 발전을 이끌 인재 양성을 위한 공과대학 설립을 발원했다. 이에 인천시가 교지를 제공하고 정부가 설립 비용을 부담하고 국민이 성금을 모아 1954년 인하공과대학이 개교할 수 있었다. 이는 민족교육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였던 동포들의 이민 역사가 모국에 귀환한 상징이다.

 

▲이승만 박사의 국책대학 설립 의지와 인하공대 창학 - 강옥엽 인천시사편찬위원

▲ 강옥엽 인천시사편찬위원

인천에 인하공대가 설립된 요인은 크게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국내의 경제 및 교육정책과 관련됐다. 6·25전쟁으로 남한의 경제기반은 송두리째 파괴되었던 것에 반하여, 미국의 대한경제원조는 구호사업과 전재복구에 치우쳐 자립자족경제를 위해 생산기반 확립이 시급했다. 이에 따라 교육정책도 과학기술교육을 발전시켜 국가재건을 실현하겠다는 계획이었고 과학기술교육의 실천을 위한 생산교육이었다.

둘째, 이 시점에 하와이에서는 이민 50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고국에서의 의미 있는 사업이 논의 중이었다. 이승만은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의 교육관은 확고했는데, 특히 남녀평등관은 곧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한인여자학원(1915)의 설립이며 이를 확장한 한인여자성경학원(1916),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1918)으로 발전했다. 그의 학교 교육정책과 교육관은 인하공과대학 설립의 바탕이 됐다.

셋째, 이승만 대통령의 기술인재양성을 위한 공과대학 설립 의지는 한인기독학원 부지 매각 대금 희사로 구체화 되어 인천과 하와이를 연결하는 이름의 ‘인하(仁荷)공대’가 설립됐다. 인하공대는 국책대학 성격의 특수한 위상을 지닌 사립대학이었다. 인하공대가 인천에 세워진 것은 하와이 이민선이 떠난 고국의 마지막 공간이 인천항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기념적 의미가 있지만, 인천이 수도권 항구도시라는 지리적 이점과 경인공업단지가 있다는 점도 고려됐던 것이다.

하와이 그리고 인하대와의 역사적 연원이 깊은 인천은 2023년 현재 750만 해외동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재외동포청’개청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이러한 시점에 인천이 한민족 공동체사회 구현의 중심이라는 시대적 과제는 인하대학이 다문화속 새로운 인재육성을 위한 제2의 창학을 준비해야 하는 교육적 과제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하대의 역사는 곧 인천 근현대사임을 기억해야 한다.

 

▲조중훈 박사의 인하학원 인수와 인하대학교 제2의 창학 - 양윤모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 양윤모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 양윤모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인하대학교는 이승만 정부의 지원과 미국 하와이 교민들의 성금으로 탄생했다. 출발은 인하공과대학이었다.

인하공대는 건립의 주체와 대학을 운영하는 주체가 어디인지 명확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이 대학은 국립이나 공립보다도 하와이 동포와 국내 동포의 합작으로 성립된 재단으로써 설립하는 것이 더 의의 깊은 바가 있는 것”이라는 대학의 설립기성위원회 발기취지서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설립의 주체는 명확하지만 그 성격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국·공립 재단 성격은 배제된 사립재단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결국 사립재단이면서 운영은 정부의 관리를 받는 특이한 성격이 부과된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성격은 1968년 조중훈이 정부로부터 인하공대를 인수하면서 사라지게 됐다.

인하공대는 1971년 종합대학으로 전환되면서 인하대학교로 명칭이 변경됐다. 2003년 개관 당시 아시아 최대 대학도서관인 정석학술정보관이 바로 인하대학교 재단 이사장 조중훈의 호(號)인 정석(靜石)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중훈의 일생은 두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기업입국’이고 다른 하나는 ‘육영입국’이다. 조중훈의 기업입국 출발은 1945년 11월 인천에서 창업한 운수업체인 한진상사였다. 그리고 육영입국의 출발이 바로 인하공대 인수이다. 인하공대를 인수할 당시 인하공대의 사정은 그 이중적인 성격으로 인해서 상당히 불안하였다. 형식은 사립재단인데 재단의 구성은 정부가 주관하였기 때문에 학교의 운영자금 역시 사실상 정부 지출 형태였다. 조중훈의 인하공대 인수는 사립재단에 정부가 개입한다는 딜레마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중훈은 한진상사라는 기업집단의 사주로서 인하학원 이사장으로서, 기업과 육영사업이라는 두 형태를 조합시키는 특이한 포지션을 가졌다. 1975년 1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중훈은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후진을 길러내는 사업만큼 보람과 가치가 있는 일이 어디 있는가”라고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인하공대 인수와 인하대학교의 발전은 재단이사장 조중훈의 이러한 교육관이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 조혁신 자치행정부장.
▲ 조혁신 인천일보 논설실장.

/조혁신 인천일보 논설실장 mrpen@incheonilbo.com

/인하대학교 총동창회·인천일보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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