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룡 칼럼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야누스의 얼굴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예지(叡智)의 상징답게 앞뒤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 다만 언제부턴가 본래 의미와는 다른 변절자, 기회주의자로 쓰여 지는 것은 '두 얼굴'이란 뉘앙스에서 이중 인격을 연상한 때문일까.

얼굴은 인격을 가늠케 하는 첫 인상이다. 인간관계에서 얼굴을 내민다는 것은 곧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믿음을 뜻함이 아니겠는가. 때마침 6·2 지방선거를 겨냥하고 출사표를 만지작거리는 예비후보를 떠올리는 까닭은 우리를 대변하겠다는 그들의 가려진 얼굴에 향하는 궁금증이다.

일찍이 링컨은 40세를 넘기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했다. 모름지기 지역사회의 사표(師表)가 되고자 나선 위인일진대 얼굴에 새겨진 부족함의 본질을 자주 성찰해야 한다.

말로는 공명정대를 외치면서 속내로 위선을 서슴지 않았던 왕년의 선거 풍토를 답습치 않기 위해서도 진정한 얼굴값이 아쉬운 시기다. 이렇다 할 철학과 소신 없이 이해상관 따라 좌우고면 하는 일부 예비후보로 하여금 현대판 야누스 얼굴이 어른거린다면 지나치다 할 것인가?

속담에 몰염치한 무리를 일컬어 "얼굴이 꽹과리 같다"고 했다. 겉만 번지르르 할 뿐 속빈 강정 닮은 정치꾼은 소리만 요란하고 원칙 없이 낡은 사고를 답습하기에 경계 하자 함이다.

그런데 사람이 살다 보면 별 희한 일과 맞닥뜨린다. 자고로 벼슬은 높을수록 좋은 것으로 여겨 왔는데 이번 선거를 통해 '하향 지원'이란 이변이 번지고 있으니 말이다.

예컨대 현직 고관과 화려한 경력자가 과거에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시장, 군수, 구청장 등에 대거 도전하고 있음은 뭣을 뜻함인가. 하기야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서 할 말 있겠는가. 하지만 속내가 그게 아니어서 뒷공론이 무성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산적한 민생 과업을 외면해 개점 휴업 꼴인 일부 자치단체의 파행이 바로 '하향 지원'이 낳은 표본사례가 아니던가. 언제는 당에서 특정지역의 정책 출마를 애걸해도 꿈쩍 안했던 위인들이 요즘 와서 정반대의 행보를 옮기는 것은 뭣을 뜻함인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정치 생리를 알고 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바로 요즘의 추세가 겉으론 새로운 도전의식처럼 신선해 보여도 부분적으로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를 한풀 벗겨 드러난 본색은 오로지 기초단체장 위상이 높아짐에 따른 권한상승에 솔깃한 이기적 발상일 따름이다.

그나마 공천 시즌에 접어들면서 이런 '먹이 감'을 놓고 집안끼리 헐뜯기에 경황 없어 민심을 수렴할 의지의 여백이 궁금할 따름이다. 더욱 가관인 것이 일단 당으로부터 전략공천을 받아 놓고 나면 떼 놓은 당상이라는 투로 유권자는 안중에도 없으니 이게 무슨 민의 수렴인가. 특히 이점은 우위의 기득권을 지닌 위치에 있는 자의 자만 없기를 바라는 충고다.

선거철이면 그 많은 경합자가 하나 같이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불신이 나서기 일쑤였거니와 올해엔 변해 보자는 당부다. 이 점은 항용 인천시의 투표율의 전국 최하위권을 맴도는 이유가 우연히 아님을 웅변하는 대목으로 곱씹어야 한다.

일찍이 케네디는 미국 국민에게 이렇게 반문한 적이 있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뭣을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뭣을 할 수 있는가를 되물어 보라"고. 이를 차용할진대 예비후보 각자가 선거를 통해 어떤 실속을 챙길 것인 가는 차선책이다. 오로지 당면한 민의가 뭣인가를 깨우쳐 구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가를 이어 자성해야한다.

화두로 돌아가 본래 야누스의 상징성 그대로 과거와 미래를 잇는 현실을 직시함이 우리의 당면한 정치 덕목임을 거듭 일깨우자. 그것이 곧 나라와 백성을 위한 바람직한 야누스적 참 얼굴일진대 예비후보자의 기초 선거전략 또한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