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의 꿈 강화 눈뜨다 / 1 고려는 왜 강화도를 택했나 - 천도 논의와 '고려궁지'
'대륙전 위주 몽고군' 격퇴 염두…비옥한 환경 매력

건축양식·명칭 등 궁궐 안팎에 옛수도 자취 오롯이


'왕'은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에 있었다. 앞으로는 바다가 출렁이고 뒤쪽으론 산자락이 펼쳐진 자리였다. '배산임수'는 고려시대 궁궐과 사찰의 대표적 형태다. 적과의 싸움에서 방어와 공격을 효율적으로 하려면 이런 지리적 요충지가 유용했다. '고려궁지'(강화읍 관청리 743)는 정확히 그런 지점에 세워졌다.
강화도는 고려왕조의 서광이자 개경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1232년 남겨두고 떠나온 개경의 궁궐은 강화도에 그대로 옮겨졌다. 고려왕조는 강안전, 경령전, 건덕전을 비롯해 14개 건물들의 건축양식과 이름을 개경과 똑같이 붙였다. 건물 뿐 아니라 산이름까지 고쳐 불렀다. 본래 '북산'이던 강화궁궐의 뒷산은 '송악산'으로 바뀌었다. 개경궁궐 뒷산 이름이 송악산이었던 것이다.
꽃샘추위가 끝나지 않은 3월 중순, 도로에서 200여m쯤 언덕을 오르니 빛바랜 자주색 대문이 드러난다. '승평문'이란 편액이 걸린 대문은 고려왕궁의 정문이다. 문 안으로 발을 들여 놓자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강화유수부 동헌인 '명위헌'이다. 더 안쪽으로 '외규장각' 건물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강화동종'이 육중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고려궁지 안에는 이처럼 세 채의 건물만이 삼각구도로 자리한다. 고려궁지에서 조선시대 건물이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조선의 행궁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세 채의 건물을 제외한 궁지의 대부분은 넓은 잔디밭과 언덕의 모습이다. '반드시 몽고를 쳐 내고 말리라'. 왕이 고뇌하며 서성였을 궁지를 천천히 걷는다. 겨우내 얼었다 이제 막 녹기 시작한 땅은 금빛잔디로 뒤덮여 있다. 용맹한 무신들과 아름다운 궁녀들이 바람으로 스쳐지나간다.
외규장각 뒷편 거대한 천을 덮어놓은 언덕에선 지난해부터 암막새, 수막새와 같은 고려유물이 발굴되는 중이다. 현재진행형이므로 천을 씌워놓은 것이다. 강화군은 고려궁이 현재 면적보다는 훨씬 넓은 반경으로 퍼져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의 흔적을 좇아 북산을 오르는데, 어디선가 산짐승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 고라니다. 사슴을 닮은 고라니는 펄쩍 펄쩍 뛰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3월의 고려궁지엔 이제 봄을 준비하는 잿빛나무와 새 소리 뿐이다. 778년 전, 이 땅엔 수십 만명의 고려인들이 정착했었다. 고려왕조는 왜 10만 세대나 이끌고 강화로 왔을까. '강화천도' 논의는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고려의 무신집권자 최우는 1232년 6월16일 자신의 집으로 대신들을 소집한다. 천도하기 한 달 전이었다. 재부와 중추원의 신하들이 하나 둘 최우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앞서 2월부터 세 차례나 회의가 열렸으니 공식적으로 네번 째 회의인 셈이었다. 대신들을 맞는 최우의 얼굴은 차가웠다. 팽팽한 긴장감을 뚝 끊어뜨리듯 최우가 입을 열었다.
"빠른 시일안에 강화로 천도를 해야겠소. 대업에 대하여 좋은 의견이 있는 사람은 말해보시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승단이 용기를 냈다.
"도성을 포기하고 종묘사직을 내버리고 해도로 도망가 구차한 세월을 보내자는 말이오? 몽고를 예로써 섬기고 신으로 사귀면 그들도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오!"
최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때마침 밖에서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초지유 김세충이었다.
"송경은 태조 때부터 역대로 지켜내려와 무려 200여 년이 되었소. 성이 견고하고 군사와 양식이 풍부해 충분히 사직을 호위할 수 있는데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오!"
그러자 최우가 되물었다.
"그럼 천도를 하지 않고 이곳 개경에서 나라를 지킬 방안을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
김세충이 머뭇거렸다.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어사대부 대집성이 최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대집성의 한마디 한마디는 김세충을 향한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김세충이 아녀자의 말만 듣고 감히 큰 의논을 저지하려 합니다. 그를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
김세충이 마당으로 끌려나왔다. 붉은피와 함께 순식간에 김세충의 머리가 최우의 집 앞 마당에 나뒹굴었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천도를 결단케 한 대집성을 비롯해 재추 정무, 상장군 김현보, 최종준 등은 최우의 천도론을 지지한 인물들이다.
최우의 강화천도 결정은 자신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리적 이점이 컸던 게 강화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이유였다. 강화는 개경과 매우 가까우면서 대단히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대륙 중심의 싸움에 능한 몽고군은 갯벌과 염하를 건너 쉽게 오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보다 설득력 있는 얘기는 강화 토박이들 사이에서 구전되고 있다. 강화인들은 강화도의 풍부하고 비옥한 지리적 여건이 강화천도의 이유였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강화 사람들을 중심으로 회자되는 이 관점은 학설로 정립되진 않았지만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강화도는 예성강, 한강, 임진강이 한 곳으로 모여 바다를 이루는 황금어장이다. 민물과 짠물이 합쳐지므로 어족이 풍부할 수밖에 없다. 전국으로 나가는 새우젓의 70%가 강화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강화는 특히 오래 전부터 매립의 역사를 갖고 있는 섬이다. 매립은 상당 부분이 고려 이후 이뤄진 것이지만 그 이전부터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강화에서 시원한 눈맛을 주는 너른 평야를 자주 마주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매립된 땅이 많기 때문이다.
강화에선 지금도 "한 해 농사지으면 10년에서 20년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기정사실화 돼 있다. 고려왕조에게 강화도는 한마디로 훌륭한 '요새'이자 '젖과 꿀이 넘쳐나는' 섬이었던 것이다.
/글·사진=김진국기자 blog.itimes.co.kr/free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