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미술인들 - 9. 황추
인천대표 서양화가 … 인상파적 표현 탁월

1958년 국전이후 십여차례 특·입선 경력

1976년 중년에 미국 건너가 추상화 도전





황추(1924~1994)는 낙조, 가을과 같은 빛깔의 그림을 그린 인천미술계의 대표적 서양화가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화가로 활동하다 도미, 미국에서 여생을 마친 황추는 인천의 풍경을 빚어내는데 누구보다도 탁월한 느낌을 가진 소유자였다.
그가 서양화의 표현기법을 배우던 시기는 해주 제2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해주미술학교에 입학하고 부터다.
황추는 이때 원로 박성환 화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황추가 인천에 정착한 것은 한국전쟁 때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황추는 중등교사 자격시험을 거쳐 송도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한다. 이제 막 화가로서의 기반을 다져나가기 시작한 시기다.인천지역의 미술전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기 시작한 때는 1954년 8월 인천시립박물관에서다.
당시 열린 '광복미술 기념전'에서 황추는 김병수, 김영건, 박영성과 나란히 자신의 작품을 올렸다. 이후 '앙데팡당전'을 비롯해 인천에서 열린 거의 모든 전시회에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화려한 국전경력 때문이었다. 당시 인천은 서예를 제외하고는 국전에서 선명한 실력을 보여준 화가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황추는 58년 제7회 국전에 입선한 이후 15차례 연속 입선했으며 1966년~1967년에는 연2회 특선을 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경모 미술평론가는 "황추의 국전 입·특선 경력은 서양화 분야에서는 초유의 사건으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며 "그 뒤 박영성 화백이 74년 제23회 국전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그 무렵 황추는 한국화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며 "그의 개인전에 관한 기록을 보면 '1963년 11월14일부터 24일까지 인천시내 명다방에서 황추씨의 개인전이 열렸다. 전시작품은 동양화 13점, 서양화 16점이었다. 본래 서양화 전공이었으나 근년에 와서는 동양화까지 연구하고 있다. 전시된 작품중에는 국전작품도 3점이 포함되었다'고 적혀 있어 그의 예술적 편력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국전 입선경력의 화가인 황추는 미술시장에서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63년 '앙데팡당전' 출품작 가운데 황추의 작품이 가장 높은 가격에 팔린 것이다. 다른 작품은 천원 대인데 비해 '추경', '항구'와 같은 그의 작품은 2만 원에 팔린 것으로 돼 있다.
황추는 인천 미술계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65년 미협 경기지부 지부장을 맡아 인천 경기도 미술계를 이끌었고 같은 해 경기도문화상(미술부문)을 수상한다.
67년에는 '녹원의 여상'으로 66년에 이어 연 특선을 하고 70년에는 인천 소월다방에서 '낙조의 항구' 등 100호 이상의 대작 4점과 소품 10여 점으로 개인전을 갖기도 한다.
국전 특선작 '녹원의 여상'은 정원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 여인을 그린 것이며 '낙조의 항구'는 자유공원에서 인천항을 내려다 본 인상파 풍의 풍경화이다.
문총 최고위원에 피선되는 등 인천은 물론 전국에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혀가던 그는 76년 미국으로 건너간다.
프랑스 파리에 가서 유학하기 위한 첫 여정지가 미국이었던 것이다.
이경모는 "황추는 도미후 자연의 풍광을 성실하게 관찰하던 종래의 방식을 포기하고 비정형의 추상회화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며 "이는 그가 30여 년간 지속해 왔던 방법론을 지양하고 미국화단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을 찾아 자기화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추는 미국에서도 시카고 아리랑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역임하는 등 교민사회에도 잘 적응했다. 1990년대 지병이었던 위암이 악화돼 94년 타계할 때까지 황추는 인천의 석양 같은 빛깔의 삶을 살다 떠났다.<끝>
/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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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노력하는 입지전적 인물"

인터뷰/ 이 경 모 미술평론가

"황추 선생의 미국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것이었지요.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온 국전 초대작가 황추를 알아주는 미국인은 없었어요. 물론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갔지만 그것은 단지 이민의 형식이었고 그는 이방인에 불과했어요."
미술평론가 이경모(48·사진)는 "황추 선생은 1976년 식솔들을 이끌고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며 "그것은 그가 젊어서부터 꿈꿔왔던 도정이고 화가로서 결코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그의 입장에서 하나의 실천적 의미를 갖는 용단이었다"고 말한다.
"황추 선생은 호구지책으로 막노동을 마다하지 않았어요. 처음 미국을 프랑스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 생각했던 그는 생활고에 쫓겨 파리에 갈 엄두를 낼 수 없었어요. 작가로서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그에게 단순한 생활인으로서의 미국생활은 무의미한 것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추는 1970년대 부터 자신이 미국에 갈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러 차례에 걸친 초대전과 개인전을 통해 자신의 면모를 알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황추의 미국행은 오래 전부터 준비된 여정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기 시작하자 1949년 제1회 전 이후 중단됐던 국전이 1953년 부활합니다. 이 무렵 인천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미술인들이 대거 국전에 입선해 주목을 받기 시작하지요. 선두주자는 유희강, 박세림, 장인식 등이었습니다. 당시 국전은 작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등용문이라고 할 수 있었어요. 지역작가들이 중앙 미술계에 발을 디디고 살아남기 위한 통과의례로 국전 경력은 중요한 잣대였지요."
여기에 더불어 중요한 이력이 파리, 뉴욕 등 바로 세계 화단의 중심지에서의 유학·활동경력이었다.
"1920년대 인천 출신인 장발을 비롯해 배운성, 이종우, 나혜석 등이 미국이나 프랑스로 향했고 1950년대에는 남관, 김흥수, 이응로, 김환기 등이 그야말로 꿈의 무대에 데뷔하기 위해 화구를 꾸렸던 것이죠."
황추는 이런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실천한 입지전적인 화가였다는 게 이 평론가의 설명이다.
결국 황추는 1958년 국전에 입선한 이후 연9회 입선하고 2차례에 걸쳐 특선을 한다. 추천작가로 다섯 번 국전에 출품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국전 30년 역사상 16회나 작품을 건 화려한 경력의 화가인 셈이죠."
 
/글·사진=김진국기자 (블로그) freebird

작품설명
'태양이 있는 마을', 캔버스에 유채, 1985.
'낙조의 항구', 캔버스에 유채, 1969.
'생동', 캔버스에 혼합재료,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