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으로 사정은 돌변했습니다. 무서운 속도로 북진하던 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위세는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국군의 사기도 떨어져 후퇴할 지경이 되었고, 맥아더 장군의 만주폭격 제안은 투루먼 정권의 불가방침으로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후퇴명령을 받게되었고, 계절은 겨울로 흘러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의 일은 계속 되었습니다. 육군 경기지구 선무관현악단의 두번째 시민위안연주회는 단원들의 의견이 분분해 연습은 그런대로 끝났으나 시국상태를 보면서 해나가자고 결정한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때는 12월 중순 쯤으로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된다는 것이 주변의 중론이었습니다.
 그 피난길이 언제가 될지라도 인천기독교구국청소년합창단의 두번째 연주회는 강행하자는 것이 합창단 간부들의 결연한 의지였습니다. 시민들은 피난간다고 야단법석인데 무슨 합창연주회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단원들의 순수한 열정에 끌려 크리스마스 축하를 겸한 연주회를 갖게되었습니다. 청중도 별로 많지않았습니다만 뜻깊은 연주회였습니다.
 연주회가 끝난후 험난한 피난길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회의를 했습니다. 피난을 가더라도 합창단이 함께 부산쪽으로 가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가족들과 조촐하게 피난길에 오르면 간단한데, 50명 가까운 합창단을 단장, 지휘자 자격만으로 인솔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을 외면할 수 만은 결코 없었습니다.
 나는 한참이나 침묵했다가 드디어 합창단과 함께 피난가기로 결심한 것을 밝혔습니다. 회의장은 환호 아닌 함성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로부터 하루 이틀이 지났을까,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밀려내려오는 중공군을 피해 후퇴작전을 감행하는 중 흥남항에서 성공적으로 후퇴작전을 마무리짓게 되었다는 뉴스였습니다. 미국 정부가 민간인에게 주는 그해 크리스마스의 최대 ‘선물’이라고 흥남항 철수작전 성공을 기뻐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주안집에 돌아온 나는 부모님에게 가족과 함께 피난 못가고 합창단을 인솔하고 피난가게됐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뜻밖에도 아버지는 “좋은 결정이다. 다른 젊은이들은 목숨을 헌신짝같이 내버리고 전쟁하고 있는데 너도 합창단 인솔자로 단체 피난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할 것이야”하면서 허락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농장집에 남아서 나의 구닥다리 피아노를 사수하시겠다며 어머니와 어린 누이동생은 삼촌가족과 제주도로 피난가라고 하셨습니다. 옆에 앉아 우시던 어머니는 저의 악보와 책들은 농장밭에 묻혀있는 빈 노깡(土管)에 넣어두자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왈칵 울음이 치밀어올랐습니다. 다른 가제도구는 신경도 안쓰고 대신 내가 7∼8년동안 작곡해 온 악보원고와 기성악보, 그리고 문학책들만 묻어두고 피난길에 오르자는 어머니의 마음! 구닥다리 피아노를 사수해야되니 피난을 가지못하시겠다는 아버지의 마음! 이제 두 부모님은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그런 마음으로 외아들인 나를 아끼시던 부모님에게 나는 평생 불효자였을 뿐입니다.
 1951년 1·4후퇴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육군경기지구 선무관현악단연주회때 애를 써주신 엄희철 대위를 만나서 합창단이 함께 피난을 하게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참이나 심사숙고한끝에 마침내 1월4일 아침 9시까지 인천항 부두에 있는 몇 호 L.S.T 앞에 집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합창단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게됐구나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계속> <작곡가·인천시향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