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고 기쁨으로 넘쳐 있었지만 사회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극도의 혼란상을 야기하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독불장군격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일제의 억압과 학정에서 풀려난 후에 있을 수밖에 없는 혼란상이었을 겁니다.
 그 와중에서도 나는 중학교 시절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작곡하면서, 예술분야에도 큰 관심을 갖고 지내지 않았습니까. 특히 문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무사히 서울대 음대에 진학할수 있었고 많은 선배 음악가나 선생님뻘 되는 음악가도 많이 알게 되었고, 조병화씨 같은 시인과도 친하게 지낼수 있었고, 내딴에는 평화롭게 해방후를 보내고 있을때 6.25전쟁이 터진겁니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이 정식으로 통과되면서 합법적인 정부가 탄생되고, 들리는 바에는 김구 선생님이 평양의 김일성 주석과 통일문제를 논의하러 갔다왔다는 뉴스도 있은 후 돌연 6.25전쟁이 터졌으니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날벼락을 맞은 듯 가슴이 뛰고 , 겁이 나고 어쩔줄 몰랐습니다.
 라디오 뉴스를 들으니 개성의 12연대가 북한군과 격렬한 공방전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나의 친척중 한사람이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우리집 주안 농장에서 일을 거들던 중 징집돼 군대에 간후 12연대에 배속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그 아저씨도 격렬한 전투 한복판에 있겠구나 생각되니 손에, 아니 가슴에 식은 땀이 흐르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6월25일에도 기차를 타고 서울 남산의 학교로 갔습니다. 학생이나 교수님들이 모두 갈피를 못잡고 서로 웅성대면서 걱정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도 나는 학교로 갔습니다.
 한낮쯤 되니 서울 하늘에 두대 정도의 잠자리 같은 비행기(헬리콥터가 아님)가 서로 기총사격전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진짜로 6.25전쟁이 발발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동료 학생들과 걱정섞인 몇마디를 남겨두고 서로 기약없는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만났던 몇몇 친구중 지금까지도 못만난 이들이 여러명 있습니다. 혹은 북한에서 살고 있는지 알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날 등교를 끝으로 남산교사에서 공부하는 것은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주안집으로 돌아온 것은 어두컴컴한 저녁무렵이었지요. 농장집 안쪽에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나를 기다리면서 긴시간을 길가에 서있었다고 말하더군요. 이대 성악과에 재학중인 나의 음악동아리 친구중에 한사람인 김모양이었습니다. 글쎄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의 싹트임이었는지 저는 함께 모여서 음악이야기, 그 밖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김양에 몹시 호감을 가졌었고 이상한 마음 흐름을 억누를 수 없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따로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 가서 기다리다가 여러번 허탕을 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날 6.25전쟁이 난 이틀 후 저녁에 뜻밖에도 우리집 농장 앞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왕 왔으니 꾸밈없는 내 방에서 이야기나 좀 하자고 말을 건넸으나 김양은 길가에서 몇마디 하고 가겠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약속하고 여러번 약속을 어긴것은, 사실은 불시에 독서회에서(공산주의 이념토론회) 연락이 오면 다른 약속은 다 저버리면서 그 독서회에 나가지 않으면 않됐었거든요” <계속> <인천시향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