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나의 고향 인천에 살고계신 여러분 안녕하시지요.
 올해 제야의 종소리를 들은 것이 어제와 같은데 어느덧 나무들은 홍엽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 가을이 되었습니다. 그렇듯 세월이 빠르다 보니 저도 어느새 청춘도 지나가고 황혼의 낙조를 보는 듯 고희를 넘은지 수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어려서 천진난만하게 뛰놀던 고향이 아쉽도록 못내 그리워진다는 것은 그저 말뿐이 아니라 살다보니 요즈음 뼈저리게 실감이 납니다. 다시 이삿짐을 싸고 인천에 와서 살고 싶을 뿐입니다. 이삿짐이라야 악보와 음악서적, 문학서적, 작품원본 등 몇 트럭분밖에 않되는 짐인데 그냥 주저앉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이런차제에 지난 9월 중순경 인천의 송도 쪽에 있는 비치호텔에서 열린 ‘인천시립교향악단을 사랑하는 모임’ 총회에 초대돼 가보니 뜻밖에도 회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송구한 마음으로 회장직을 수락하게 되니 어떻게 모임을 최대한으로 발전시켜 나가야할까 하고 요즘은 그것이 큰 걱정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운 나의 고향 인천시민들이 적극 호응해 주실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그러던중 인천일보 문화부 기자한분이 저에게 연속 칼럼 ‘최영섭의 음악이야기’ 집필을 요청하게 된바 처음에는 이핑계 저핑계로 사양을 하다 결국에는 승락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첫회부터 ‘하이든’ 음악이, ‘모짜르트’의 어느 음악이, ‘베토벤’의 어느 명곡이 하며 써내려가야 원칙이겠으나 그리운 나의 고향 인천사람들의 읽을거리인 만큼 본론의 이야기에 앞서 ‘나와 인천’에 대해 서술하지 않을 수 없어 몇자 더 써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에서 작곡가로, 지휘자로, 음악방송과 음악감상회 해설자로, 음악교육계 교수로 일가를 이루고 있는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자 최영섭이가 왜 여기 글귀에 여러번 ‘그리운 나의 고향 인천’하고 쓰고 있는가.
 한마디로, 인천 앞바다 주변의 검은 갯벌을 보고 걸어다니며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지내지 않았다면 현재의 ‘나’라는 작곡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항상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지난 세월을 유심히 보니, 나의 작곡생활의 노른자위는 인천에 살고 있었을때 이루어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1963년 못내 정들었던 인천을 뒤로 소위 서울의 음악중앙무대에서 ‘여봐라’는 듯이 종행무진으로 일하면서, 명성 얻기에만 급급했었지 않았나 하고 생각되니 이제와서 남은것이 무엇이 있나 하고 여겨집니다.
 입센의 ‘페르귄트’에 나오는 대목처럼 주인공 페르귄트가 귀향 길에서 땅바닥에 털퍽 주저 앉아 양파를 까면서 내뱉은 한말. “양파는 벗겨도 벗겨도 알맹이는 없고 껍질뿐이네. 이럴바에야 고향으로 돌아가자” 라는 독백의 넋두리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 나의 서울 음악중앙무대 생활이 아니였었나 하고 강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이렇듯 나이들어 나의 작품을 되새겨보니….
 <최영섭·작곡가·인천시립교향악단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