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화수·화평동(花水·花平洞)은 근대 개항기부터 동네를 형성한 곳이다. 꽃(花)과 물(水)을 뜻하는 화수동은 우리말 '바닷물 넘나드는 무네미 마을'로 통하기도 했다. 인천 개항 1년 전인 1882년 5월22일(고종 19년)엔 화수동에서 한국과 미국이 처음으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한 역사적 장소로 기억된다. 이곳엔 일제 강점기 들어 경·중공업 공장이 많았다. 1936년엔 인천부 화평면, 1946년엔 경기도 인천시 화평동이었다. 그러다가 1998년 화수1·화평동(행정동)으로 통합돼 오늘에 이른다.
화수·화평동엔 일찌기 일제가 설립한 공장이 즐비했다. 조선기계제작소·정미소·성냥공장·대규모 기숙사 등이 수두룩했다. 기계업종을 비롯한 공업사(史)는 일제 때부터 해방 후 1990년대 초까지 한국기계공업·일진전기·두산중공업·현대제철·동일방직 등 굵직한 기업으로 이어졌다. 광복 후 경인공업지대로 발전해 인천 산업의 기틀을 다졌고, 이들 공장을 위한 배후 주거마을로 자리를 잡았다. 노동자들이 개항기는 물론 산업화 시기에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었던 동네다. 이들이 함께 모여 살며 북적거렸고, 고된 생활 속에서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화수동은 부두로도 유명했다. 1970년대 초 연안부두 건설 전까지는 화수부두로 거의 모든 고깃배가 들어올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 화수부두는 과거 우리나라 3대 어항으로 꼽혔다. '인천 돈의 절반이 모이는 곳', '지나는 개들도 돈을 물고 다니는 곳' 등의 우스갯 소리가 나올 만큼,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여객선과 어선들이 연안부두로 빠져나가면서 화수부두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뒤늦게나마 수산물 직매장과 현대식 회센터 등을 지어놓았어도, 옛 영화를 되찾기엔 역부족이다.
인천시립박물관이 지난 18일부터 10월15일까지 '피고 지고, 그리고… 화수·화평동' 특별전을 진행한다. 재개발을 앞둔 원도심 화수동과 화평동을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기획됐다. 동구청·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과 공동으로 마련한 전시는 사라져가는 이전 기록을 찾아 그곳에 살았던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와 풍경을 엮어냈다. 1부 '무네미에서 벌말까지', 2부 '곶섬은 어디인가', 3부 '노동자 수평씨의 하루', 4부 '화수동과 화평동의 오늘'로 구성됐다.
개항·광복·전쟁을 거치면서 고단한 우리 삶의 족적을 간직한 곳이 화수·화평동이다. 이런 옛 모습을 기리는 일은 역사적 의미를 찾는다는 상징성을 띤다. 동구의 도시생활사는 곧 인천의 지역사 아니겠는가. 전시회를 둘러보는 시민들에게 '시각의 전환점'을 이루길 기대한다.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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