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 강 하 진

1943 대구 생

1963 경북중, 서울 체신고 졸업

1972 제4회 신체제 그룹전(이후 100

   여회 단체^초대전 참가)

1974 강화교동중 미술교사 부임(이   후 인천여고 등서 20여년 봉직)

1976 1회 개인전(이후 개인전 19회)

1979 한국 신설작가 12인 초대전(관   훈미술관)

1983 상파울로 비엔날레(브라질),

  이탈리아 한국현대미술전(밀   라노)출품

1984 서울 국제드로잉비엔날레 참가

1990 예술의전당 개관기념전

   설치미술전(토탈미술관)

1992 현대미술 초대전(국립현대미

   술관)

1994 서울 국제현대미술제(국립현

  대미술관)

1997 인천 현대미술 초대전 운영위   원장, 현대 미술 8인의 시각전   (다인아트갤러리)

1998 98"인천 영상미술제 운영위원   장, 국전 심사위원하진화백의 30년 화단 역정에서 금년은 매우 뜻깊은 의미를 갖는 해이다 미술대전(국전) 심사위원으로, 98"인천 영상미술제 운영위원장으로 바쁜 일정을 보냈으면서도 생애 19번째 개인전(11월21∼27일까지^다인아트갤러리)을 열어 다시금 그의 파란만장한 화단 역정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평생동안 늘 아웃사이더로 아카데믹한 제도권 미술계의 권역 밖에서 한국의 중요한 현대미술운동에 동참해온 그의 화력(畵歷)을 생각해 볼 때 그가 금년 미술대전(국전) 심사위원을 했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이는 우리 나라 화단의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경향이 완화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현대미술사에서 그가 갖는 위상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여 특기할 만하다.

 사실 강하진의 진가는 현대 미술이라는 난해한 권역에서 확고한 인문적 소양과 자신의 그림에 대한 명쾌한 소신을 갖고 일관성 있게 매체와 질료를 탐색해오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미술평론가 윤우학교수는 그의 그림과 매체가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강하진이 지금껏 전개시켜왔던 작업의 본질적인 특성은 무엇보다 매체(medium)에 대한 고도로 긴장된 관심과 더불어 그것을 표현의 수단으로써가 아니라 「표현 그 자체」로서 직접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점에 집약될 수 있다. 사실 매체라는 것은 예술적인 어떤 완성을 향해 형성되어져 가야만 할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재료로서 언제나 표현의 한 수단으로 징발되고 대기하여 왔던 일종의 유보적인 존재에 불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하진이 애매한 존재로서의 매체를 단순히 재료라는 차원에서 출발시키지 않고 정신적 존재로 출발시켜 종래에는 작가가 그것과 합일하려 했던 동양예술정신과 그 발상적 태도가 흡사하다 할 것이며 이는 그만큼 사물에 대한 그의 접근 자세와 사념의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Art in Korea」 1994

 그가 현대 한국화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1972년 「신체제 그룹전」이다. 신체제 그룹전은 서울미대 출신의 해방세대인 권순철, 박수남, 이강소, 조용각 등 아직까지 한국 현대 화단을 이끌어 가는 당시의 젊은 세대들이 주도한 전시회로 70년대에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실험예술전이었다.

 이 전시회에서 강하진은 철사더미를 화랑에 전시하여, 그리는 사람들의 집단인 제도권 예술계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가 싶더니 그후에는 사방 2m의 공간에 솔잎더미를 전시함으로써 그가 매체에 갖는 태도를 확고하게 천명하고 있다. 이는 작품활동 목적이 어떤 형상이나 이미지, 혹은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행위의 농축에 따라 작업(상황) 자체가 이루어 질 수 있었던 시간과 장소의 근원을 밝히게 하는데 있음을 피력하는 것이었다.

 70년대에 그는 지속적으로 오브제, 빛, 음향 등을 사용한 입체^설치 작품을 선보여 주목 받는다. 이는 한국 화단에 멀티미디어 아트가 일반화되기 이전의 일로서 오늘날 첨단 매체미술이 판치는 상황에서 볼 때 한국화단에서 그는 이 방면의 선구자가 된 셈이다.년대에 이르러 한국화단은 모더니즘 계열의 모노크롬화(단색화)가 민중미술과 신구상회화의 물결 하에 급속한 퇴조를 보이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담론하에 입체^설치작품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이때 그는 갑자기 설치작업을 그만두고 평면으로 회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편 이 무렵 그는 「상파울로 비엔날레(1983)」, 「이탈리아 한국 현대 미술전(1983)」, 「한일 현대 미술전(1984)」, 「82년 문제작가 초대전」등에 초대 출품함으로써 한국 현대 화단에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강하진이게 한 것은 그의 천(布)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천이라는 지지대에 유채(有彩) 또는 무채의 바탕화면을 만들어 포가 갖는 흡수성과 물감 자체의 내재율에 의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풍부한 마티에르의 화면에 화면과 작가의 극적인 긴장감이 드러나는 유형^무형의 형태들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천 작업은 오늘날까지도 강하진 작품의 주된 내용이자 형식이기도 하다.

 1987년 미술회관에서 있었던 「강하진 천(布)작품전」은 세간에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된다.

 사실 강하진은 작업과정에서 드러나는 그와 화면과의 치열한 긴장관계, 그리고 매체의 특성에 의해 자율적으로 드러나는 물성, 즉 회화 자체에 내재하는 근원성에 주목하는 작가이다.의 최근의 작업은 이전의 작업에서 간간이 보여주었던 낙성 등의 형태가 주는 규정적 성격마저도 제거하는 과정에서 질료 자체와 지지대와의 타이트하고 밀도 있는 관계를 추구하며 화면에 극적인 긴장감을 조성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그가 화면 앞에서 고뇌하며 한붓 한붓 칠해 나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이 때의 긴장감은 예술 자체의 감정이입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관객에게 전달되고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작가, 작품, 관객 사이에 생명성(긴장관계라는 것은 살아 있는 것 사이에만 존재하므로)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강하진과 인천화단의 연관성은 단순히 그가 인천에 거처를 두고 교육하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뿐 아니라 보수적이고 아카데믹한 이 지역의 풍토를 개선하는데 힘써왔다는 점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그는 진보적인 작업과 현대 미술에 관한 확고한 인식론으로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또한 인천의 현대 미술운동을 주도해 왔다.

 일단 그는 최병찬, 이종구, 조덕호 등과 「현대미술 상황전」이라는 전시회를 만들어 10년간 존속시킴으로써 80년대 인천의 현대 미술운동의 자생적 역량을 기르도록 하는데 힘써왔다.

 1980년 남빈화랑에서 처음 열린 이 전시회는 인천에서 「현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라는 지향점을 맨 처음 천명한 전시회이자, 현재 작업하고 있는 30∼40대 젊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전시회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아울러 그는 오늘날에도 『인천 현대 미술 초대전」, 「현대 미술 8인의 시각적(97)」, 「98"인천 영상 미술제」 등을 주도하며 작품외적인 측면에서도 인천이라는 지역화단의 낙후성과 보수성을 일신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이경모/미술평론가〉

이러한 관심은 90년대까지 지속되는데 당시의 강하진의 작품에 대한 미술평론가 윤진섭씨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강하진을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는 하나의 판단에 기초하고 있는 바, 그것은 다름 아닌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합류점에 그를 위치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모더니즘 회화가 지녔던 한계인 관념성과 민중미술의 명백한 과오였던 몰(沒)예술성을 지양하고 양자의 결합을 충족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전범을 일종의 사례연구로 삼을 수 있는 토대를 그의 작품이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美術世界」(1992)

즉 80년대 초반 그가 해왔던 프레임을 제거한 두꺼운 캔버스 천에 동양적인 일필을 가하고 뿌리기 기법 등으로 약간의 변화를 준후 입체적으로 화랑에 전시하여 회화성과 조소성을 동시에 보여주던 일련의 작업들과 갑자기 결별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