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 11. 16.

 새벽에 어두운 길을 더듬어 일출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둠과 안개에 싸인 태산의 새벽 공기는 찬바람이 되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바위산을 오를수록 예상치 못한 바람이 세차게 분다. 많은 사람들이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추위와 바람을 피하면서 일출을 기다린다.

 중국사람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호텔에서 빌려온 군 외투를 입어 마치 중공군이 집결한 진풍경이다. 사람들은 365일 매일 뜨는 태양을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다가 왜 산 정상이나 바다에만 가면 태양을 보려고 저 야단일까?

 진풍경이거나 아름답다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일상생활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 보다 나은 새 것을 찾으려는 욕망일는지 모른다. 날은 점점 밝아오는데 안개에 묻혀 해를 볼 수 없다는 체념에 발 디딜 틈없던 일출봉은 서서히 한산해진다.

 중국 불교계의 지도자이며 명필인 조박초(趙樸初)가 바위에 일필휘지(一筆揮之)한 조화종신수(造和鍾神秀)라고 쓴 글을 보고 해석이 분분하다. 두보(杜甫)의 「망악(望嶽)」의 한 구절인데

 

 岱宗夫如何(대종부여하)

 齊魯靑未了(제노청미료)

 造化鍾神秀(조화종신수)

 陰陽割昏曉(음양할혼효)

 ?胸生曾雲(탕흉생증운)

 決칛入歸鳥(결자입귀조)

 會當凌絶頂(회당능절창)

 一覽衆山小(일람중산소)

 

 태산이 어떠냐 하면

 제, 노나라 푸른 모습 끝이 없다.

 조물주는 빼어난 신품들을 다 모았는데

 산의 앞쪽과 뒤쪽은 밤과 새벽으로 갈렸다.

 뭉게구름 솟아나니 마음이 고동치며

 눈을 크게 뜨니 돌아가는 새 보인다.

 반드시 산 정상에 올라가

 뭇 산들이 작은 것을 한눈에 내려다보리.

 

 청년 두보의 초기 작품으로 태산의 정상에 올라가 천하를 굽어보고 싶다는 말 속에는 젊은이다운 호기심과 함께 야망과 기대감이 살아 뛰는 것 같다.

 

 태산에 와서 시를 읊은 사람이 어찌 두보 뿐이랴. 이백(李白)이 「종고어도상태산(從故御道上泰山: 황제가 오른 7천여 계단을 따라 태산에 오르다)」이라는 장시(長詩)를 남겼으며 이 고장 출신 장양호(張養浩: 1270~1329)의 「등태산(登泰山)」 또한 유명하다.

 장양호는 원(元)나라 때 사람으로 감찰어사가 되었으나 직언직간(直言直諫)으로 권신들에게 미움을 사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그후 다시 예부상서(禮部尙書)에 복직되어 정사에 참여 할 수 있었으나 권세의 부침에 염증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은거했다. 이때의 작품 중 하나가 「등태산」이다.

 

 風雲一擧到天關 (풍운일거도천관)

 快意生平有此觀 (쾌의생평유차관)

 萬古齊州煙九点 (만고제주연구점)

 五更滄海日三竿 (오경창해일삼간)

 向來井處才知隘 (향래정처재지익)

 今後巢居亦覺寬 (금후소거역각관)

 笑拍洪崖쵢新作 (소박홍애영신작)

 滿空笙鶴下高寒 (만공생학하고한)

 

 바람과 구름은 일거에 천관에 이르고

 평생 유쾌한 마음으로 태산을 바라본다

 만고에 빛나는 중국 천지가 어둠 속에 묻히고

 새벽 창해로 솟은 태양은 어느새 아침을 밝힌다

 종래 속세에서 익힌 얄팍한 재주와 지식은 나를 괴롭혔지만

 금후 새처럼 집 높이 짓고 큰 생각으로 살리라

 벼랑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맞추어 미소지으며 시를 읊으니

 빈 하늘엔 피리소리 가득하고 학이 날아오니 높고 서늘하다

 

 일출봉에는 단(壇)을 쌓아 올리지 않았는데도 바위 바닥에는 첨노대(瞻魯臺)라는 글자가 크고 붉게 새겨져 있다. 돌바위로 된 일출봉 자체를 단으로 보았는지? 공자가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 했는데 두보, 이백, 장양호 등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노나라만이 아니라 우주만물을 생각하고 삶을 깊이 성찰했으리라. 짙은 구름에 묻혀 산 위에 솟은 해를 볼 수는 없었지만 산동 벌판을 질주하는 이정기(李正己: 732~819) 장군이 보인다. 세계 제국인 당(唐)의 심장부인 산동일대를 장악하고 독립왕국을 세운 뒤 4대에 걸쳐 55년 동안 당 조정과 대립했던 투지와 웅대한 뜻이 살아오른다. 또 산동 넓은 들판 너머 발해만이 있고 동양의 지중해인 황해가 출렁이는데 항해하는 장보고(張保皐)의 선단과 깃발이 보이는 듯 하다.

 아침에 옥황정을 올랐다.

 옥황정은 태평정(太平頂) 천주봉(天柱峰)이라고도 하는데 태산의 최고봉이다.

 도교에서 모시는 무상(無上)의 신인 옥황상제가 계신 곳.

 바로 이곳이 태산의 정상이니 중국사람들이 태산을 얼마나 높이 모시는지 알만하다.

 옥황정에는 묘(廟)가 있어 옥황상제를 모시고 역대 제황들이 봉선 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등봉대(古登封臺)라는 기념비를 세워 놓고 있다. 또 「극정(極頂) 1,545m」라고 씌어진 돌기둥 표시가 있다.

 정상은 바람이 크고 거세다.

 바람이 아니라 돌풍이 불어닥친다. 우리 일행 중에는 모자를 잃은 사람도 있다.

 묘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이 청제궁(靑帝宮)이다. 중국에서는 동은 청(靑), 서(西)는 백(白), 남은 적(赤), 북은 흑(黑) 그리고 중앙은 황(黃)으로 상징한다. 여기서 청은 태산을 의미하므로 옥황상제를 모시는 궁이 된다. 매사에 빠지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는 중국사람들의 습관에는 언제나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벽하사는 옥녀사(玉女祠), 소진관(昭眞觀)이라고도 한다.

 재물과 생명 그리고 자손의 번영을 관장하는 여신(女神)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신 사당이다. 언제부터 벽하사가 있었는지 정확하게 전하고 있지는 않으나 송나라 진종(眞宗) 원년(1008년)에 창건되고 명·청 시대에 크게 확장하고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벽하원군을 모신 정전에는 강희황제가 쓴 찬화동황(贊化東皇)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벽하원군을 태산의 큰 신 중 하나로 모신다. 그리고 여인들은 특히 더 이곳에 와서,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을 빈다.

 이러한 사당은 이렇게 높고 험한 곳에 있어야 영험해지는지!

 태산에는 무려 2천2백여 곳에 역대 제왕과 문인들이 남긴 석각들이 있는데 이로 인해 이곳을 중국역대마애석각예술 박물관(中國歷代磨崖石刻藝術 博物館)이라고도 한다. 이들 석각 중에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태산진각석(泰山秦刻石)을 비롯해서 고대 제왕들의 친필과 시인 묵객들의 흔적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벽하사의 동북쪽에 있는 대관봉(大觀峰)의 절벽에는 봉우리를 평면으로 갈아 만든 석비들이 줄지어 서 있어 장관이다. 설명하기에 필력(筆力)이 너무나 부족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 중에서도 장엄하여 압도되는 것은 높이 13.3m 폭 5.3m의 거대한 석비인데 당 현종이 봉선 의식을 할 때 만들었다는 천하대관기 태산명비(天下大觀紀泰山銘碑)가 그것이다. 모두 996자가 예서체로 각인되어 있고 글자마다 금빛으로 빛난다.

 주위에는 운봉(雲峰), 산고망원(山高望遠) 등 태산의 아름다움과 웅대함을 저마다 명필로 새겨 놓았다. 태산의 석각들 중에 최근의 것으로는 벽하사에서 천가(天街)쪽으로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길게 서 있는 암벽에 많이 보인다.

 등영초(鄧潁超)여사의 간화자로 쓴 글씨가 퍽 인상적이다. 주은래(周恩來: 1896~1976)의 부인이며 동지였던 그녀가 남편이 죽은지 8년 후 그 자신이 팔순이 되던 지난 1984년 이곳에 와서 남긴 등태산간조국산하지장려(登泰山看祖國山河之 壯麗)라는 글이다.

 태산에 올라보니 조국 산하가 크고 화려하다는 회포는 그의 생애와 함께 주은래를 떠오르게 한다. 평생을 오직 조국을 위해 바치고 자녀는 없었지만 유산은 물론 죽은 뒤에는 무덤도, 비석도 없이 시신을 화장토록 하여 조국 산하에 뿌리게 했던 주은래, 그리고 1992년에 저 세상으로 뒤따라간 등영초 자신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화장한 후에 그 뼈를 산하에 고루 뿌리게 한 인물이 아닌가! 두 사람의 왕생극락(往生極樂)을 말없이 빌어본다.

 계속해서 팽진(彭眞)의 산고망원(山高望遠)은 산이 높으니 먼 곳을 볼 수 있다는 뜻보다는 군자(君子)의 덕성이 멀리까지 비친다는 의지가 엿보이고, 교석(喬石)의 해대종목(海岱縱目)은 바다와 태산을 마음껏 볼 수 있다고 해석되는데 이것도 팽진과 같은 분위기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이붕(李鵬)의 보호세계유산, 건설동악태산(保護世界遺産, 建設東岳泰山)은 표어 같은 냄새가 나서 무미건조하다. 이붕이 공학도 출신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앞서 팽진, 교석은 전국대표자대회 상임위원장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는데 이붕도 총리를 그만두고 지금은 전국대표자대회 상임위원장에 있으니, 운명이라면 묘하다 하겠다. 그 외에도 많은 글이 새겨져 제각기 뽐내고 있으나 낯설어 지나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