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ㆍ 현대美 아우른 陶彫예술가1935 충남 예산생

1961 인천 남중ㆍ고 미술교사 부임

1983 인천 미술대전 특선(공예), 입   선(조소)

1984 한중 교류전(대만)

1987 대한민국 공예대전(국립 현대   미술관)

1988 서울산업대 산업디자인과 졸업

1989 서울 현대도예 비엔날레(서울    시립 미술관)

1991 도조 개인전(신세계갤러리),    미국 LA문화원 초대전

1992 북경 한국 무역대표부 초대전

1994 인천 종합문예회관 개관기념    초대전

1995 제2회 도조 개인전(바탕골 미   술관, 부평 동아갤러리)

1996 한국의 흙ㆍ불(97 동계 U대회    기념 국제조각 심포지엄)

1998 인천 현대미술초대전 운영위원

현재 한국 공예가협회 회원, 한국 미   협 회원, 인천 조각회 회원늘은둔자적인 모습으로 인천 미술판에서 아웃사이더 경향을 보여왔던 도조가(陶彫家) 송덕빈선생(宋悳彬ㆍ64)은 그야말로 작품으로 말하고 실천하는 작가상의 전형이라고 할만한 분이다.

 아울러 그는 1961년 인천 남중ㆍ고에 미술교사로 부임한 이래 제물포여중, 인천여중을 거쳐 산곡여중에서 명예 퇴임한 1996년까지 학생들의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키워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고 꿈을 심어준 존경받는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중ㆍ고교시절 그에게 교육받은 바 있는 미술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음을 강조하곤 한다.

 일례로 얼마전 필자는 조각가 고정수의 작업장을 방문한 바 있는데 그가 조각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중ㆍ고교시절 은사였던 송덕빈선생의 가르침이 커다란 바탕이었음을 술회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송덕빈선생이 미술교사로 재직할 당시 그는 선진국에서 사용하는 미술교과서를 입수하여 학생들이 흥미를 갖고 시간에 임할 수 있도록 수업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조형교육에 특히 신경을 써서 학생들이 입체작품의 구조를 이해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그의 수업 방식은 학생들의 재능을 발견ㆍ고무시키는 한편 흥미를 갖고 수업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인천 남중이 문교부에 의해 「특별활동 연구 지정학교」로 결정되어 송덕빈은 자신의 연구실이외에 회화실, 디자인실, 조소실을 가진, 어떤 면에서 교수 부럽지 않은 교사생활을 한 적도 있다.

 이러한 송덕빈선생의 가르침에 힘입어 인천남중은 유능한 화가 조각가를 많이 배출하였다. 이미 언급한 고정수를 비롯한 한기주(강릉대 미술학과교수), 정현(조각가), 김창곤(조각가), 최은규(화가) 등이 그들이다.

송덕빈은 1934년 충남 논산에서 송명순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송명순은 인쇄업을 하였으나 생활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송덕빈은 늘 동생들에 대한 부양의 책임감을 느껴야 했다.

 경기공업 중학교(6년제)를 졸업하고 한양대 건축과에 합격하였으나 아버지는 서울미대에서 운영하는 중등교원 양성소(2년제 사범과정)에 진학할 것을 권하여 인물 데생 시험을 치르고 이곳에 등록하였다. 여기에서 송덕빈은 장발교수에게 미술사를, 김세중교수에게 조소를, 김흥수화백에게 데생 및 회화를 배웠다.

 수료후 인천에서 교사와 작가생활을 병행하던 송덕빈은 경기도 미술교육과정 지역안 작성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박영성, 이철명, 이언구 등과 미술그룹 「청우회」를 조직하여 작품을 발표하고 인천 미협전과 중등교사 미술전 등에 꾸준히 출품하고 있다.

 이런 전람회에 회화와 조각을 출품하며 개인전도 가진바 있는 그는 갑자기 1986년 52세의 나이에 경기개방대(현 서울산업대) 산업디자인학과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도예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이런 결정은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용단이었으며 이순을 바라보는 늦깎이 대학생 송덕빈은 도조뿐 아니라 공업디자인 등에도 실력을 보여 이 학교 주ㆍ야 270명중에 수석으로 졸업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이미 인천 미술대전에 공예와 조소부문에 동시 특ㆍ입선한 경력이 있던 그는 대한민국 공예대전에 출품하여 2회 입선(87년, 90년)하고 이어 「서울 현대 도예 비엔날레(89)」, 「미국 LA문화원 초대전(91)」에 초대 출품하는 등 도조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1991년 송덕빈은 신세계갤러리에서 그의 첫 번째 도조전을 열었다. 모정과 어린이를 주제로 한 그의 작품들은 원시와 현대, 입체와 평면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오늘날의 미감을 충실히 반영한 작품들이었다.

 60, 70년대 송덕빈이 평면회화와 돌조각에 관심을 갖고 이를 매제로 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조형세계를 표출해 왔다면 80년대 이후 그는 흙이라는 매제를 통하여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어머니와 아이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실 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전통도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적 수단으로 다양한 층위의 흙작업이 진행되어 왔고 이의 일환으로 도조(陶彫ㆍceramic sculpture)라는 장르가 영역을 확보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도조는 기존의 도자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반성과 그에 대한 동종요법적 대안으로 탄생한 것이다. 송덕빈은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이러한 기류에 동참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주목되는 도조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된다.

 1994년 가을 서울 동아갤러리에는 이색적인 기획전이 마련되었다. 이른바 「한국 陶彫의 지평전」으로써 흙에 대한 페이소스를 갖고, 실용성보다는 예술성에 기반하여 도조작업을 하고 있는 한국의 유망한 도조가 12명을 초대하여 나름의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펼쳐보도록 기획한 것이었다. 설치와 테크놀로지 영상미술 등 첨단 매체미술이 판치는 세상에서 가장 전통적이라 할 수 있고 자칫 공예품정도로 경시될 수 있는 도조예술을 현대 미술과 동일한 지평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기획자의 소신이 돋보이는 전람회였다.

 여기에서 미술평론가 이재언은 「송덕빈의 경우 반추상화된 인물들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입체성과 양감이 잘 드러나 보인다」고 평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송덕빈의 모자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의 모자상은 구조면에서 모자(母子) 2인의 인물을 하나의 괴체(塊體)로 다루고 있다. 이는 도자 성형의 기술적 측면에서 감안된 일이기도 하겠지만, 두 인물의 견고한 일체감과 돈독한 애정을 상징적으로 전하기 위함이 더 앞서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두 인물의 닮은꼴 얼굴이나 대칭관계 등과 맞물려 모정의 숭고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중요한 핵심을 이룬다.」

 이어 1995년 서울 바탕골 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은 도조가로서 송덕빈의 위상을 미술계에 확연히 보여주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여기에서 송덕빈은 그만의 독특한 형식을 갖는 도조작품, 즉 원시적(Primitive)인 고졸미(古拙美), 좌우대칭의 안정감, 탈해부학적 비례와 단순성, 그리고 치밀한 공간구성에 의한 집약적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작품들을 대거 선보이면서 한국 미술계에 깊은 인상을 심어놓게 된다.

 그후 송덕빈은 「인천 현대미술 초대전(92-98)」 「한국의 흙, 불(96)」 「이탈리아 페루지아 초대전(96)」 「서울 공예대전(97)」초대작가, 「인천ㆍ상해 국제 미술 교류전(97)」 「스웨덴 동양박물관 초대전(97)」, 그리고 「체코 국립 아시아 미술관 초대전(97)」 등에 참여하면서 중진 도조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현재 그는 작업장을 만드느라 강원도 평창의 두메산골에 머무르고 있다. 그와 대화하면서 시종 느낀 점이지만 천성적으로 겸손한 그의 이면에 언뜻언뜻 보이는 의욕과 에너지는 젊은이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경모ㆍ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