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지·친일 논란…아호 딴 '미술관' 세울 수 없었다

['인천시립일랑미술관' 추진 파문]
일랑 이종상 화백 작품 기증되면서 구상
“인천과 관련 없다” 반발…결국 철회

['이당미술·기념관' 친일행적 걸림돌]
'인천 대표 화가' 이당 김은호 화백
기념관, 市 아닌 가족·제자들이 운영
▲ 2009년 8월28일 인천시청에서 열린 이종상 화백 작품 기증 양해각서 체결식에서 안상수(왼쪽) 전 인천시장과 이 화백이 양해각서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2009년 8월28일 인천시청에서 열린 이종상 화백 작품 기증 양해각서 체결식에서 안상수(왼쪽) 전 인천시장과 이 화백이 양해각서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2009년 8월 28일, 인천시는 일랑 이종상 화백으로부터 소장 작품 1300여 점과 자료 등을 기증받고, 그 대신 연수구 옥련동 송도 석산 일대에 인천시립일랑미술관을 건립해 기증품을 전시·보존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인천의 문화예술계가 '인천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미술인의 이름을 딴 시립미술관을 왜 지어 줘야 하냐'며 거세게 반발했다. 몇 개월을 버티던 인천시가 반발에 밀려 계획을 철회하면서 일단락되었다.

1938년생인 일랑 이종상 화백은 광개토대왕, 원효대사, 장보고 등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의 표준 영정을 많이 그린 작가다.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냈는데 특이하게도 서울대 박물관장까지 역임했다. 이종상 화백은 또 5천 원권의 율곡 이이 영정과 5만 원권의 신사임당 영정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1977년부터는 독도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도 가졌다. 독도 그림은 일랑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 일랑미술관 계획 부지 '송도 석산'.
▲ 일랑미술관 계획 부지 '송도 석산'.

미술계의 유명인이었지만 일랑 이종상 화백의 아호를 딴 시립일랑미술관 건립 구상은 인천 문화예술계에 커다란 파문을 가져왔다. 문화예술계에서는 반대 의견을 계속해서 제기했다. 일랑이 인천 연고도 없는 데다, 사전 논의도 없이 인천시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는 이유였다. 인천시가 즉각적인 철회 방침을 밝히지 않자 여러 단체가 연대하고 나섰다. '인천 시립 일랑 개인미술관 건립을 반대하는 인천문화예술단체연대' 조직까지 만들어졌다.

이렇게 되자 인천시는 일랑미술관 건립 계획을 보류한다고 했다. 말이 보류였지 실제로는 없던 일이 된 거였다. 시는 일랑미술관 건립 대신 인천시립미술관 건립 사업에 집중하겠다고 방향을 틀었다.

인천시는 일랑미술관 사업을 추진하면서 이종상 화백과 인천과의 연관성을 두 가지 측면에서 내세운 바 있다. 그의 대표작인 '마리산'이 강화도 병인양요를 소재로 했다는 점과 그가 인천 출신 '어진(御眞) 화가'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 화백의 제자라는 거였다.

일랑은 1997년 프랑스 문화부 초청을 받아 파리 루브르박물관에서 세로 6m, 가로 71m의 대형 벽화인 '원형상 97601-마리산'을 전시했다. 병인양요를 소재로 한국과 프랑스 간의 용서와 화해를 표현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5개월간 전시했는데, 관람객이 127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인천 강화도의 아픈 역사를 프랑스를 비롯한 세계에 알리는 작품활동을 했다는 게 인천시의 입장이었다. 또 하나, 그가 5천 원권 율곡 이이 영정 도안 작업을 할 때나 이미 그 이전부터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서 우리 전통 인물화 방식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 그가 우리나라 위인들의 표준 영정을 많이 제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당의 영향이 컸다고 내세웠다. 대표작이 인천 관련 작품이고, 스승이 인천의 인물이니 인천 연고가 없는 게 아니란 설명이었다.

인천의 문화예술계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인천 문화예술계를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이당의 제자를 자처하면서, 인천에서 스승도 갖지 못한 미술관 명칭을 어떻게 제자가 쓰겠다고 나서느냐는 반응도 있었다. 이당은 인천 출신의 대표적 화가이면서도 친일 논란 때문에 대표가 될 수 없는 처지다. 공공기관에서는 이당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이나 기념관을 만들기 어려운 상황이다.

▲ '이당 기념관' 터.
▲ '이당 기념관' 터.

이당 김은호 화백은 만년에 고향 땅 인천에서 생활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이당은 세상을 뜨기 직전, 중구 송학동 3가 5번지에 집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때가 1978년이었다. 그 이듬해 이당은 고향에서 만년을 보내지도 못하고 타계했다. 그 직후 가족과 제자들은 송학동 집을 이당기념관으로 만들었다. 이당의 마지막 제자로 일컬어지는 이정(以汀) 장주봉 화백이 관장을 맡았다.

문화예술인들의 활동 공간으로 탈바꿈한 이 집은 원래가 제8대 인천 해관장을 지낸 영국인 윌리엄 맥코넬(William McConnell)의 주택이었다. 이당기념관으로 쓰인 맥코넬의 집 이야기는 신태범(1912~2001) 박사가 1983년에 펴낸 <인천 한 세기>에 실려 있다.

<인천 한 세기>에 나오는 맥코넬 집의 건축 배경만 간략하게 살펴보면, 맥코넬이 1905년 인천해관장으로 부임했는데, 1906년 일제가 식민통치 사전 기구인 통감부를 통해 실질적인 국가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해관장을 일본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그때가 26세 젊은 나이였다. 해관장 자리를 내놓은 뒤 맥코넬은 타운센트양행이 위탁운영하던 홍콩상하이은행의 지점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천에 정착하게 되었고, 타운센트의 집 위 언덕에 커다란 벽돌집을 짓고 살았다.

그 커다란 벽돌집이 이당기념관이 된 바로 그 집이었다. 맥코넬은 평안북도 삭주 금광 사업 등을 하면서도 30년 정도 인천에 살다가 1937년 인천 사무소와 주택을 처분하고 서울로 이사했다고 한다.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격 이후 태평양전쟁에 연합국이 참전하면서 1943년 영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서구식 기와집에 정원과 연못이 아름다웠다고 하는 이당기념관은 개관하자마자 인천의 대표적인 문화예술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당의 유품을 보여주는 공간과 대관 전용 전시실 3개 관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인천에 전시공간이 부족해 예술인들이 다방을 찾아다니던 시절이었으니 이당기념관을 찾는 각종 전시회며 문화행사가 줄을 이었다. 문화예술인들의 결혼식장으로도, 심지어는 49재 같은 추모식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1989년까지 10년 동안 운영되던 이당기념관은 미국으로 간 가족들이 매각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 이당기념관을 사들인 사람이 건물을 새로 지어 음식점을 경영하다가 다시 매각했다. 지금의 중부교회 제2교육관 자리다.

이당 김은호 화백은 1892년 인천 관교동에서 비교적 부유한 농가의 2대 독자로 태어났다. 어릴 적 글방에서 한문 공부를 하면서 간간이 그림 실력도 발휘했다고 한다. 그림을 본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환쟁이가 될 것이냐”며 꾸짖고는 했는데, 서당 선생님만은 그림 재주를 좋게 여겼다고 한다.

이당은 1906년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관립일어학교에 입학했다.

이당은 관립일어학교에 다닐 때 결혼까지 했으나,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친척이 형사사건에 연루되면서 부친까지 구금되고 집안의 재산마저 몰수되는 바람에 일어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후 이발소 조수, 인쇄소 잡부, 도장 새기는 일, 신발 만드는 일, 측량기사 조수 등 온갖 일을 하면서 집안을 책임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당은 그림을 꾸준히 그렸고, 그 재주를 인정받아 서화미술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대표적 친일파 송병준의 초상을 그리게 되었고, 이때 궁중 전의(典醫)의 눈에 띄어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을 그리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젊은 미술학원생이 어진을 그렸다는 소문이 나면서 김은호는 일약 장안의 스타로 떠올랐다. 귀족과 일본인 관리들에게서 서로 그려달라는 초상화 주문이 밀려들었다. 김은호의 전통기법의 초상화 제작 솜씨는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 1853~1920)과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 등에게서 물려받은 거였다. 이당 김은호를 흔히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가'라고 칭한다.

이당은 34세가 되던 1925년 일본 유학을 떠났는데, 이때 이후로 일본풍의 화법을 본격적으로 익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그림 세계에서 우리 전통미가 옅어지고 왜색이 짙어졌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이당은 3·1운동 당시 독립신문을 배포한 혐의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는데, 1937년 친일 여성단체인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를 미화하는 '금차봉납도'를 그렸다. 이후 그림으로 애국하고 봉사한다는 '조선미술가협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당은 일제강점기 후반의 대표적 친일 미술인으로 분류된다. 그 친일행적이, 고향 땅 인천에 그의 이름을 딴 공립 미술관이나 기념관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 이유이다.

/인천생각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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