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통 당시 수인선의 운용실태를 알아보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수인선 개통이 1937년의 일이니까 적어도 1927년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이나 기억 속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에 출생한 사람들도 기차를 보기는 했을 터이지만 아무래도 기억을 합리적으로 조립하려면 10세는 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수인기차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도 입학하기전 어린 나이였다. 우리 집에서 기찻길까지는 500m도 채 안되는 거리였고 기차 정거장까지래야 700보 남짓한 거리였다. 왜 정거장까지의 거리를 걸음수로 이야기하는 걸까. 그 당시 우리 또래들은 웬만한 거리는 걸음수로 계측해 보는 것이 늘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걷기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역할이 되기도 했고, 서로 예측한 걸음수로 내기를 하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우리 밭은 모두 기찻길 너머에 있었기 때문에 일꾼들의 밥을 내갈 때 물주전자를 들고 가는 것은 내 몫이었는데 그 때마다 나는 기찻길을 넘어 다녀야 했고 참외밭에서 참외를 따먹고 싶어도 기찻길을 넘어가야 했다. 지금의 전철 4호선 안산역은 바로 참외를 자주 심었던 우리 밭이 있던 자리였다.
 하루에 세번 지나가는 열차는 어린아이들에게 심심함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 낮차가 지나가는 시간이면 기찻길에 대못을 올려놓고 납작하게 눌리기를 기다렸다 못이 레일에서 튕겨나가지 않고 잘 눌리면 몇번 더 올려놓아 더 눌린 다음에 숫돌에 갈아 칼을 만드는 것이다. 칼을 만들어봐야 별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땅에다 칼을 꽂고 꽂힌 자리마다 금을 그어 나가는 칼치기를 하거나 풋밤 속껍질 벗기는 데나 쓸 뿐이다. 조금 머리가 커지면서는 기차가 지나간 뒤를 따라다니면서 골탄을 줍기도 했다. 한때 역정탄을 때는 것을 보기도 했지만 주로 무연탄을 땠다. 그런데 기차 화통에서 때는 석탄은 완전 연소가 되지 않고 타다 남은 숯이 기찻길로 떨어졌다. 그것을 사람들은 골탄이라고 하면서 주워다가 화덕에 불을 달여 쓰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수인기차를 타기 시작한 것은 1956년부터였다. 당시의 열차는 사람을 태우기는 했지만 객실은 없었다. 화물칸에 아무런 시설도 없이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형편이었으니까.
 사람을 태운다기보다 실어나른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차량 바닥은 그대로 철판이라 겨울이면 발이 떨어져 나갈 듯 시려왔고 10~20분만 지나면 거의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일반인이야 털신을 신는다든지 해서 방편을 찾을 수도 있었지만 학생들은 얇은 운동화만 신어야 했으니까 상황이 어떠했을까.
 당시에는 화물칸에 창문도 내지 않았고 출입문을 열면 바닷바람이 열차를 날려버릴 듯 몰려왔기 때문에 화물칸 철문을 닫으면 차안은 그대로 암흑의 세계였다. 하루 세번밖에 다니지 않는 열차는 늘 만원이었으니 창문도 불빛도 없는 암흑 속에서 추위에 떠는 모습이 어떠했을까. 궁여지책으로 양촛불을 켜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주로 학구적인 학생들의 몫이었다. 그 속에서도 책을 읽는 학생들이 있었다. 양초 값도 만만치 않았다.
 추위가 가시는 계절엔 좀 나을 것 같지만 수인열차 안에 봄가을은 없었다. 추위가 가셨는가 하면 곧 찜통 더위와 싸워야 했다. 화물칸 철판 지붕은 열의 변화에 민감해서 조금 날이 따듯했다 싶으면 지붕이 달궈져서 창문이 없는 열차 안은 한증막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구나 여름에는 채소며 과일 보따리를 들고 타는 사람들이 많아서 차안은 더욱 붐비고 차안 한쪽 구석은 그런 보따리들이 쌓여 사람이 발을 디딜 틈조차 없었다. 물론 수화물 칸이 따로 있었고 짐은 수화물로 붙이도록 되어 있으나 비용이 따로 들어야 했기 때문에 한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형편이라 되도록 수화물 탁송을 꺼렸다. 돈을 아끼자니 자연 많은 짐을 수화물로 붙이지 않고 운반하게 되는데 한 사람이 운반하기에는 벅찬 양인데도 끝내 붙이지 않으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심정이었다. 이고 들고 지고…, 그래도 남는 짐은 통학생들에게 출찰구까지만 들어다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짐이 모두 무사히 출찰구를 통과하는 것은 아니었다. 첫번째 시련은 기차 타기전 플랫폼에서부터 시작된다. 역무원들은 짐의 크기를 봐서 수화물로 붙이라고 폼에 쌓아둔 화물들을 골라내고, 화물 주인은 골라낸 짐을 다시 제자리에 놓는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기차가 도착하면 부랴부랴 짐을 싣기에 눈코 뜰 새가 없다. 짐을 싣는 중에도 이번에는 승무원들이 짐을 차 밖으로 끌어내린다. 짐 때문에 사람들이 탈 수가 없는 형편이니 역무원이나 열차 승무원들도 어쩔 수 없다. 이런 실랑이는 대개 송도역쯤에서는 승무원도 짐 골라내기를 포기한 입장이라 다소 조용하지만 짐에 치인 승객들은 짐에 치이고 사람에 치여서 거의 탈진상태에 이른다. 이것이 1950년대 말까지의 수인선 열차 풍경이었다.
 군자, 원곡, 고잔, 일리 등지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짐들은 대부분 곡류나 야채 과일 등이었고 인천에서 실리는 짐들은 생활용품들이 대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