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단은 2천여평에 이르는 벽제관지 터의 흙을 파내고 주춧돌등을 복원하고 있어 조선 중기 건축문화와 양식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조사단의 한 관계자는 『벽제관지는 나라에서 지은 역관이므로 조선 중기 객사 건축물 가운데 당시 최고의 건축기법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사단은 지금까지 조선 중기 빗살무늬 기와조각 200여점, 자기조각 50여점, 적심적(초석을 받치는 돌)10여점 등 모두 260여점의 유물을 발굴 자료를 연구하고 있다.

 벽제관지는 1479년(성종 7년)에 처음 건립된 뒤 1625년(인조 3년) 고양군으로 옮길때 지금의 위치에 세운 것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의 숙박 휴식처였으며 조^중 교류의 주요 요충지로 사용됐던 곳이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일부가 헐리고 6^25때 파괴된 뒤 65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그 터가 사적 144호로 지정됐지만 관리 소홀로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었다. 벽제관지는 대지 2천1백51평, 건평 601평에 방이 49개나 되는 당시로서는 큰 규모로 건립됐으며 현재의 터 이외에도 인근에 큰 연못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1억원의 예산을 들여 벽제관지 발굴조사를 의뢰한 고양시는 정부와 경기도에서 예산을 지원받지 못해 약 100억원 가량이 소요될 원형 복원사업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