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호 언론인
제주 여정은 세월 따라 달라졌다. 90년대까지는 종종 시외버스를 탔다. 처가에서 차를 내줬지만 버스가 편했다. 길눈이 어두워서이다.
하지만 10여년 전부터 크게 달라졌다. 렌터카가 대거 등장하면서다. 최저가 항공에 경차를 예약하니 경비도 줄었다. 덩달아 체류기간은 짧아졌다. 그런데도 다닌 곳은 많아졌다. 길눈이 어두운 한계는 내비게이션으로 넘어섰다. 가라는 대로 가면 되니 길을 잃을 일은 없다. 하나, 높아진 편의성만큼 잃은 것도 많다. 속도와 효율을 앞세우니 '중한 것'들이 뒤로 밀린다.
내비게이션은 공간을 거리와 방향으로만 본다.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 '장소'는 고려할 게 못 된다. 그 곳은 다만 텅 빈 공간이다. 경로를 따라 놓인 장소들의 가치 역시 소거된다. 과정이야 어떻든 목적지에 이르면 된다. 이런 속성은 도시인의 삶과 닮았다.
장석주는 "산다는 건 장소를 경험하는 것"이라 한다. 소설가 김훈도 비슷한 생각이다. "지도를 보는 자는 맥락을 읽는 자"라나. 사는 건 사람과 장소 사이에서 비벼지는 그 무엇이다. 그러니 과정과 관계, 맥락이 귀하다는 얘기겠다.
기실 '지도를 본다'는 것과 '내비게이션을 켠다'는 것은 다르다. 기계 속 그 곳은 한 점 개별 공간. 지도 속 '장소'는 거느린 것들과의 관계에서 각별한 가치를 갖는다. 여행은 그렇듯 낯선 곳을 경험하는 것인지라, 요즘 제주 여행의 아쉬움이 크다.
따져보면 제주야 내비게이션 아니어도 길을 잃을 걱정은 없다. 길을 놓친들 걱정이 없는 섬이다. 엉뚱한 곳을 향했다 해도 그게 더 좋을 수 있다. 제주 어디를 간들 '그 곳' 못지않다.
돌아보면 제주와의 오랜 인연 중 가장 풍요로운 여행은 시외버스 타고 다닌 그 시절이다. 낯선 곳에 내려 지도를 보며 마냥 걷던 그 곳. 오지 않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며 주변을 바라보던 그 때야 말로 맨눈과 가슴으로 제주를 만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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