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선은 늘 혼잡했고, 지금도 여전하다. 인천과 서울을 오고가며 100년 넘게 운행되고 있는 서민들의 교통수단이다. 하루 승객 50만 명이 이용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경인선의 혼잡, 지연, 고장, 사고 기사는 사회면 단골 소재가 되기도 했다. 혼잡한 경인선은 인천의 확장과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사진=인천일보 DB
경인선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철도이지만, 100년 이상 혼잡했고 여전히 그렇다. 여러 병행 노선들이 개통한 지금도 이용 승객 수가 하루 약 50만 명(승차 기준, 환승 미포함)에 달한다. 이 혼잡의 궤적을 더듬어 가면 300만 확장도시 인천의 과거와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예상할 수 있다. 최근 발간된 '확장도시 인천'에 수록된 전현우(31·과학철학자·철도연구자)씨의 '경인선:혼잡 연대기'를 통해, 경인선의 혼잡이 어느 정도였고, 이에 대응하는 당국의 조치가 인천 확장과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등을 짚어본다.


[혼잡 현황]
서울2호선 제외 가장 혼잡 '최대 혼잡도 308%'...평일 46만·年 34만명 이용

경인선은 언제나 철도공사 수도권 전철에서 승객 밀도가 가장 높았고, 지금도 서울 2호선을 제외하면 가장 혼잡하다. 이 노선의 이용객은 연평균 34만 명, 평일에는 약 46만 명이다. 이 노선은 장거리 통근 노선이기도 하다. 전체 승차객 28%가 아침 시간에 몰려있는데다, 모든 역에서 8시대보다 7시대(7시~7시59분) 승차객이 더 많기 때문이다. 서울지하철에서 승차객이 가장 많은 시간대는 통상 8시대라는 점과 대조된다.

아침 시간 동인천역에서 출발하는 급행열차의 좌석은 3분의 2 정도 차 있다. 열차의 좌석은 주안역에서 꽉 차고, 입석 승객이 1량당 15명 이상 나온다. 동암역을 거쳐 도달하는 부평역에서는 인천 1호선에서 올라온 승객까지 더해져 일대 혼잡이 일어난다. 열차 1량당 승객은 160명을 넘는다. 이 값은 열차 정원, 즉 혼잡도 100%이며, 덩치가 큰 승객은 조금만 움직여도 주변과 어깨를 부딪친다. 부평역 회차 열차가 네 편 설정된 것도 이런 혼잡 때문이다.

수많은 승객이 탑승하는 송내·부천을 지나, 역곡역에서는 이미 타기 어려워보이는 문을 밀고 승객이 탑승해 들어온다. 이곳에서 혼잡도는 당국의 권장 혼잡도인 150%(240명/량)를 한참 넘기게 되며, 열차는 이 혼잡 그대로 구로역까지 9분 동안 달린다.

경인선 이용객은 누구나 구로역 진입 직전에 신호 대기를 받지 않을지 걱정한다. 그만큼 구로역은 선로가 복잡한 곳이다. 운전 정리가 길어지면 열차가 구로역 밖에서 5분 정도 서 있을 수도 있다. '지옥철'의 상징과도 같은 신도림에서는 승객의 태반이 내려 2호선으로 향한다. 열차는 영등포, 신길, 대방, 노량진을 거치며 여의도와 같은 서울 서부의 거점으로 가는 승객을 내려놓는다. 한강철교 C선을 건너면 종착역인 용산역이다. 승객 다수는 완행 열차로 갈아타 서울 도심으로 향한다.

경인 급행의 현 최대 혼잡도는 160-170% 수준으로 추정된다. 이런 혼잡은 상당히 낮아진 수준이다. 한때 경인선의 최대 혼잡도는 308%에 달했다. 이는 열차 한 편성에 5000명이 타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살인적인 혼잡도가 어떻게 나타나게 된 것인지, 또 어떻게 지금 수준으로 완화될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시기별 상황]
복선·수도권전철 완공으로 승객 폭주 … 신도림서 절정
복복선화·광역버스 도입에 7호선·공항철도 등 더해져 이용객 현재 수준으로 감소

▲1965~1973년 '폭풍전야' =1965년에는 복선이 완공됐고, 1971년에는 수도권전철이 착공됐다. 이런 투자가 주변 도시를 얼마나 급격히 성장시키고 열차를 혼잡하게 만들게 될지 당시 사람들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1974~1979년 수도권전철의 개통=1974년에는 수도권 전철이 개통해 서울 도심까지 열차가 직결 운행하기 시작했다. 1977년에는 열차 집중제어장치(CTC)가 설치되는 등 배차간격을 좁히기 위한 투자도 본격화됐다.
▲1980~1988년 폭주하는 승객, 따라잡지 못해=인천·부천의 성장과 함께 주요 역의 승객이 증가한다. 1984년에는 신도림역을 통해 2호선과 환승이 시작됐다. 신도림역에서 대량의 승객이 빠져나가, 1호선의 혼잡이 신도림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구조가 이때 완성됐다.

▲1989~1998년 '지옥철'=1989년에는 언론 지면에서 '지옥철'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다. 경인선은 출퇴근 시간 승객이 '정원의 3배 이상'이라는 점이 밝혀져 최악의 지옥철로 주목받게 된다. 인천·부천의 경인선 주변은 사람으로 꽉 들어찼다. 심지어 부천지역은 부천 진입시 이미 혼잡한 열차에 탑승하기 점점 더 어려워졌기 때문에 승객이 감소하기까지 했다. 경인선의 혼잡, 지연, 고장, 사고 기사는 사회면 단골 소재가 된다. 여러 차례의 폭력 사태는 물론, 1994·1996년에는 홧김에 폭파 협박을 했던 승객도 있었으며, 국가에게 불법행위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참여연대의 소송도 제기됐다.

▲1999~2003년 복복선 개통과 서울 7호선·인천 1호선=1999년 1월 복복선이 부평까지 개통됐다. 경인선 열차 편수가 하루 약 100회 증강되면서 경인선의 혼잡은 1991년의 절반 수준으로 완화된다. 7호선은 강남 방면으로 향하는 승객을 분담할 수 있었다. 인천 1호선은 인천의 개발 축선을 바꿨으나, 부평역에는 대규모 환승객을 가져다 주었다.

▲2004~2010년 광역버스 대두=그런데 2004년 들어, 경인선의 승객수가 크게 줄어든다. 인천 시내버스가 전국 최초로 환승 무료 제도를 도입하고, 경인선 고속버스가 광역버스로 전환된데다 노선도 증강됐기 때문이었다.

▲2011~2015년 두 개의 병행철도 개통=2010년 12월 공항철도가 서울역까지, 2012년 10월 서울 7호선이 부평구청역까지 연장 개통됐다. 이로 인해 경인선 승객수가 지금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전현우 저자는 "연대기에서 볼 수 있듯, 국가 경제개발, 70년대 인천의 공업화와 동진(東進), 부천의 대도시화, 80년대의 인구 격증으로 인한 혼잡, 인천시의 도시 확장 축선 변화, 구도심 재생 논의와 철도 지하화 요구 등 이는 모두 경인선을 타고 이뤄졌다"며 "인천과 수도권 발전의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경인선을 간선으로 삼아 환승해 들어갈 수 있는 지점에 있다"고 지적했다.


[경인선을 바라보는 세가지 관점]
급행·일반열차 영향없이 운행 … 인천·부천 성장 축선

▲노선 주변 모든 지역의 도시화=경인선은 서울을 벗어나는 다른 노선과는 달리 주변 시가지가 전혀 단절되지 않는다. 이는 주변 토지가 철저히, 오랫동안 도시적으로 활용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복복선이자 인천 최대의 간선=대부분의 구간이 복복선이며, 구로부터 서울역까지는 3복선이 함께 달린다. 급행열차가 완행 열차와 영향을 전혀 주고 받지 않고 달리는 광경은 국내 다른 노선에서는 볼 수 없다. 이처럼 경인선은 한국철도에서 가장 고도화된 시설을 보유한 곳이다. 게다가 1999년에는 인천 1호선, 2016년 인천 2호선이 경인선을 중심으로 개통됐으며, 수많은 지선버스들이 경인선 주요 역에서 출발하고, 주요 환승 정류장도 경인선 주요역 부근이다. 경인선은 인천 대중교통 전체의 간선 기능을 하고 있다.

▲인천·부천의 성장 축선=복선화(1965), 수도권 전철화(1974)를 통해 국가는 수도권 인구분산, 인천지역 공업발전의 디딤돌 역할을 경인선에게 기대했다. 인천·부천의 성장 속도는 예상을 벗어난 수준이었고, 최악의 '지옥철'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이에 대응해 복복선화(1999-2005) 투자가 이뤄져 오늘날의 모습이 이뤄졌다. 복복선 투자와 함께 중동신도시 등의 대규모 택지가 들어서기도 했다.

/이동화 기자 itimes2@incheonilbo.com

/이미지 출처=철도통계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