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15일 아침의 최저 영하 18.2도는 인천기상 100년의 15번째 강추위라고 한다. 그리고 86년 이후 15년만이었다고 한다. 1904년 인천에서의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후의 기록으로 최저 랭킹 1위는 1931년 1월11일의 영하 21도였다. 그러고보면 이번보다 낮았던 때는 영하 19도, 영하 20도 등 얼마든지 있었다.

 본지 보도(16일자)의 최저기온표에 의하면 이번 추위 이전의 낮았던 때는 86년 1월5일의 영하 18.4도였다. 그때의 신문지면은 이렇게 제목을 달아 보도하고 있다. “소한추위 강습-81년 이후 최저 양평 영하 26도” “곳곳 빙판 교통두절 상수도관 동파” 그때도 신정 폭설이 몰아온 소한 한파였는데 소한이던 6일 아침의 인천 기온이 영하 18.4도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때보다 더 추웠다는 81년에는 어떠했었나. 역시 그때도 폭설에 묻힌 신정 연휴의 뒤끝이었다. 바로 양평지방이 남한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알려지던 때였다. 소한이던 5일 아침 영하 32·6도로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중부이남의 기상관측 이래 최저였다고 하는데 방안에 들여 놓았던 가게의 음료수 소주병이 얼어 터지고 김치독도 얼어붙었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중부 내륙지방의 혹한이라 인천과는 10여도의 차이가 있었고 이번처럼 여러날 계속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연일 한난계의 기록을 갱신하는 최저온도가 십여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온강산이 얼어붙어 산간의 교통두절과 가정의 수도관 동파에 달동네의 연탄 쓰레기난 등은 비슷하나 문제는 해동기에 있을 혹한 후유증이다. 기상변화는 예고가 없으며 언제 어떤 상황에 직면할는지 모른다. 그때에 대비하는 원대한 연구와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80년대의 추위 때도 혹한의 뒤끝은 심각했었다. 국도든 마을안길이든 이른바 스펀지 현상이 나타나 도로는 덧씌우기 포장공사를 하느라 남루했고 집집마다 벽돌담이 기울어 장대로 받쳐야 했었다. 농작물도 예외는 아니어서 과수의 동해로 봄을 맞았어도 새눈을 틔우지 않아 땔감으로 베어내야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