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광복 70년과 인천
[인천일보 연중기획] 광복 70년과 인천
  • 김진국
  • 승인 2015.08.10 00:06
  • 수정 2015.08.09 1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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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50)
시련·도전의 역사 '도약 밑거름'

▲ 광복과 시민들.


1945년 8월15일 정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일왕(日王)의 떨리는 목소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파됐다. 이해 8월의 인천에서는 미 공군기의 공습이 사라졌고 만주에서 피난 온 듯한 일본인 행렬과 관동군 패잔병들이 출현했다.

인천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광복의 예감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천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세화회(世話會)를 조직해 그들의 단합을 꾀하는 한편, 신변 안전과 본국 귀환활동을 전개했다.

# 일제 강점기의 인천

식민지 총독정치가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히자 1914년 4월1일을 기하여 일본인 주거주지만 인천으로 하고 나머지 지역은 부평군과 합하여 '부천군'을 신설했다. 부평의 부(富)자와 인천의 천(川)자를 합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일본인들만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한국인 거주지인 농촌지역과 일본인 거주지인 도심지를 분리시킨 것이었다.

거기에 새롭게 등장한 왜식 지명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생활권역과 공동체 질서를 파괴·약화시키는 한편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 투자해 일본인에게만 유리한 도시환경을 조성했다.

인천을 한국식민지 경영의 발판으로 삼은 일본은 식량(쌀)과 공업원료(주로 목면)를 확보하기 위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과 산미증식계획(1920년대), 수리조합 설립(부평수리조합:1923) 등을 추진했다.

인천지역사회는 이 과정에서 다른 지역에 앞서 많은 토지와 인력을 수탈당하고 대부분의 농민이 몰락했다. 그리고 몰락한 농민은 저임금의 노동자와 가계보조적 노동인구(부녀자·아동들)를 증대시켜 조선인의 노동 여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일본의 무단적 식민지정책이 강행되면서 한국인의 반일·항일감정은 날로 높아만 갔고, 그것은 점차 조직적 집단적 저항·투쟁을 도모하게 했다.

개항 후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온 노동운동과, 기독교회를 중심으로 한 청소년운동은 그 중심에 있었다. 이러한 항일운동은 일본의 식민지배 말기에 전개된 다양한 한민족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을, 우리 인천지역 주민을 광복에 이르도록 보존시킨 원동력이 됐다.

# 시련과 도전의 역사

▲ 송도국제도시.


광복의 감격 속에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면서 인천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인천은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는 중요성과 함께 교통도 원활한 지역이었으므로 다른 지역보다 일찍 미군이 진주해 군정(軍政)을 실시했다(9월8일). 미군정기 인천지역의 정국은 우익이 주도권을 잡아가는 가운데 좌익이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좌·우의 극단적 대치는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된 1947년 말까지 계속됐다.

미군정 때 잠시 제물포시(1945.10.10~27)로 바뀌었던 인천부도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경기도 인천시로 정립됐고(1949.8.15), 시의회도 구성됐으며(1952) 시장 또한 간선(間選)으로 선출됐다(1952). 그리고 이들에 의해 일본의 잔재와 미군정의 과도기적 조치들이 하나하나 청산돼 갔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은 인천지역사회에 다시 한번 시련을 주었다. 인명의 피해나 주민간의 갈등에서도 그러하였지만, 일본이 남겨 놓고 간 공장과 시설로나마 가까스로 일구어 가던 경제가 거의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인천지역사회의 본격적인 성장은 1960·7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거듭 추진되면서 이뤄졌다. 인천의 임해공단들과 부평공단(경인공단)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수출 위주로 전개되면서 이를 위한 각종 기간(基幹)시설의 확충과 편의시설의 확대가 우선적으로 마련됐다. 인천 내항 도크 확장(1966~1975), 그에 따른 연안부두 축조(1974), 경인고속도로 건설(1967~1968), 경인전철 부설(1971~1974) 등이 그것이다.

인천사회의 이러한 성장은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 주어 각종 산업을 발달하게 하고 아울러 인구 증가를 가속화시켰다. 인천시가 구제(區制)를 실시하던(1968) 당시 인천은 서울, 부산, 대구와 더불어 4대 도시로 성장해 있었고, 지속된 경제발전은 인천시의 산업과 사회를 더욱 성장시켜 인구 100만명을 돌파해 인천직할시로 승격하게 했다(1981). 그리고 나아가서는 세계화·정보화의 추세와 중국의 개방화 정책으로 인천지역의 지정학적 비중이 더욱 높아지자 인천광역시로 확장·승격되기에 이르렀다(1995).

# 인천의 미래 가치

인천 앞바다는 병인·신미양요, 운요호사건, 청일·러일전쟁을 직접 경험했고, 9·15인천상륙작전이 단행됐던 현장이었다. 6·25전쟁이 종식된 후 1954년 인천의 총인구 26만2268명 중 피난민이 7만4366명으로, 월남한 동포들이 대거 정착해 '달동네'가 형성된 곳이기도 했지만 이 역시 인천이 갖는 지정학적인 요인이었다.

후일 인천지역의 산업화가 많은 사회문제까지 동반하고 그 후유증으로 심한 몸살을 겪어야 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대한민국의 발전은 인천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인천의 시련과 애환을 담보한 것이었다.

인천은 미추홀의 탄생 이래 2000년의 긴 역사적 토양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항만과 공항을 통해 바다와 하늘을 장악한 전천후 도시이다. 여기에 더하여 2003년부터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돼 외국인 투자 및 거주에 유리한 국제화된 기업환경 및 생활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이는 해외자본의 유치를 촉진함으로써 선진적인 산업구조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글로벌 기업 활동의 중심 거점으로 육성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인천은 168개의 보물섬과 동양 최대의 갑문항, 동북아시아의 허브(Hub) 인천국제공항, 한국 최초 경제자유구역인 송도·청라·영종지구 등과 함께 도시와 농·어촌을 아우른 광역시이면서 수도권 최대의 소비 시장과 관광 상품을 갖추고 있다. 이는 도시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골고루 갖춘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거대 관문이라 하겠지만 그간 주변 여건의 악화로 인해 인천의 자긍심이 위축되기도 했다.

인천 가치의 재발견은 오랜 세월 인천지역사회가 축적한 도전과 개척의 정신을 되살리는 일이며 인천의 가치와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하는 일이다. 인천 가치의 재창조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약의 밑바탕이 될 것이라 기대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인천역사원류'는 이번 50회로 끝을 맺습니다. 그간 애독해 주신 많은 독자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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