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 논설위원

 

'범포수'란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 말기, 백두산 호랑이를 잡는 사냥꾼들이었다. 범포수들이 호랑이를 잡는 방식은 오랜 기다림 끝에 당기는 '단 한 발'의 총알이었다. 한 발을 쏜 뒤 또 총을 쏘려면 다시 화약가루를 넣어야 하는 화승총의 사격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범포수는 산 속에 구덩이를 판 채 몇날 며칠 호랑이를 기다렸다. 마침내 맞닥뜨린 범포수와 호랑이. 머리와 몸통을 바싹 땅에 붙인 채 사냥꾼을 노려보는 호랑이와 맹수를 정조준하는 사냥꾼의 시선이 충돌하는 지점에 시퍼런 불꽃이 일었다. 호랑이 미간에 총알이 박히든지, 범포수의 목에 호랑이 송곳니가 깊이 들어가든지 둘 중 하나였다.

범포수를 주제로 한 소설 <총의 울음>의 저자 손상익 씨는 "호랑이는 보통 한 번에 20m를 날아오르는데, 범포수들은 호랑이 미간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유효사거리인 10m쯤 위치에 떠 있을 때 방아쇠를 당겼다"고 말한 바 있다.

최정예 프랑스함대를 쫓아낸 병인양요(1866),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군함대를 물리친 신미양요(1871)의 한 가운데 이들 범포수의 맹활약이 있었다. 손씨는 "미국 국방문서엔 신미양요를 조선이 미국에 승리한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다"며 "신미양요때 거인 같은 미군과 백병전을 벌인 범포수들은 전사할 때도 눈을 부릅 뜬 채 적에게 '칵' 하고 피를 뱉으며 죽었다"고 말했다. 어디 범포수뿐이겠는가. 민간인인 의병과 승려인 승병 등 온 국민이 똘똘 뭉쳐 개항기 해일처럼 침략하는 외세와 맞서 싸웠다. 그렇게 지켜낸 나라가 조선이었다. 강화도 전등사가 매년 10월 진행하는 '삼랑성축제'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의병을 발굴해 기리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전투와 함께 나라를 지키는 방식은 여러 형태를 띠었다. 1900년초, 인천내리교회를 출발해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조선인들은 사탕수수밭에서 중노동을 해서 번 1달러, 2달러를 독립운동자금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였던 그 돈은 광복 이후 인하대학교 설립 종잣돈이 됐다. 인하대를 민족사학으로 부르는 까닭이다.
'이처럼 행복하게 걷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천둘레길과 강화나들길을 걸을 때마다 선조들에게 감사를 올렸다. 73주년을 맞은 8·15 광복절에 생각한다. 올 가을엔 아주 천천히 인천의 산하를 걷겠다고, 더 사랑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