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조선 초기부터 군사·교통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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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국
  • 승인 2015.0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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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 역사 원류'를 찾아서
22>제물포와 인천
▲ 1879년 제작 '화도진도'의 인천연안.
▲ 인천항 전경.
인천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곧잘 쓰이는 제물포(濟物浦)는 개항기 인천을 지칭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제물포에 대한 이미지는 "개항 당시 한적한 어촌이었다"라는 초기 기록 때문에 마치 전 시기적으로도 그러했지 않았는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일본의 자의적인 왜곡과 읍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어촌마을이었기에 그러한 해석이 통용됐겠지만, 인천은 비류가 남하했을 2000여년 전부터 해양으로의 진출이라는 도전과 개척의 과제를 안고 살아가야 했던 해양도시였다.

조선전기의 제물포
'제물'이라는 말은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 있었던 수군 기지 제물량(濟物梁)에서 비롯됐는데, 향토사학자들은 '제물(濟物)'을 '제수(濟水)' 곧 '물을 건넌다', '물가의 나루터' 등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인천 앞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워낙 커서, 물때에 맞춰 배를 대지 않으면 갯벌에 배가 얹혀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는 설명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인천군 서쪽 15리에 제물량이 있고,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萬戶)가 있어 지킨다"라고 돼 있고, 이후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수군 만호가 지킨다는 기록으로 보아 일찍부터 해안 방어의 중요지역이었다.

성창포(城倉浦)는 지금의 인천항 일대까지 아우른 이름이었는데, 이름 그대로 군량미를 보관했던 군수기지 창고로 본다면 근처의 여러 진지 중 그 역할이 특출했다. 당시의 주둔 병력을 보더라도 제물량영에는 대맹선 2척, 중맹선 1척, 소맹선 1척 등이 군사는 총 510명이었다. 해안 방어의 요충지였던 영종진이 대맹선 1척, 중맹선 2척, 소맹선 2척 등 군사 510명이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제물포는 조선 초기부터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곳이었다.

거기에 더해 수군 진지로서의 제물량영은 해안 방어뿐 아니라 조운선(漕運船)을 호송하는 중요한 임무도 수행했다. 인천 앞바다와 강화도 일대는 일찍이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삼남(三南) 지방의 곡식을 서울로 운반해 올리던 중요한 해상 교통로였다. 인천지역에 서구의 원창동(元倉洞), 동구의 만석동(萬石洞) 등의 곡식 창고 등과 관련된 지명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다. 군사적인 목적 뿐만 아니라 안전한 세곡(稅穀)의 운반을 위해서도 이미 남양부 화량만에 경기수영(水營)을 두고 그 산하에 영종진(永宗縝), 제물진(濟物縝) 등의 6개 진지를 두었던 것이다.

양란(兩亂) 이후의 제물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으면서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보강할 필요가 생기자 이들 6개 진지도 변화를 겪는데, 이중 남양(南陽)에 있던 영종진이 효종 4년(1653) 지금의 영종도로 옮겨온다. 이 때문에 당시까지 자연도(紫燕島)라 불리던 섬이 영종도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어 효종 7년(1656) 제물진이 강화로 이전해 간 뒤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제물포는 강화도나 영종도 등 인천 앞바다의 섬으로 갈 때, 배를 타는 포구의 역할을 하며 큰 변화 없이 흘러왔던 것이다.

제물포는 월미도와의 사이에 썰물 때도 한줄기 수로가 형성돼 있고, 밀물 때면 수심이 깊어 군선(軍船)이 접안해 화물 등을 실어 나르는데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서울을 오가기에 편리한 곳이므로 서해안 최적지로 판단됐던 곳이다. 개항 초기 돌제(突堤, 바다로 들어가는 강어귀에 퇴적물을 막고 수심을 고르게 하려고 바다에 뻗쳐 나오게 만든 둑)의 설치만으로도 외국의 선박이 정박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국제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은 이미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조선 태종 13년(1413) 인구와 물산을 감안한 행정구역 재편 시 인천은 군(郡)으로, 부평은 도호부(都護府)로 출발했지만 세조 5년(1459) 인천이 세조 왕비의 외가였던 인연으로 도호부로 승격됐다. 병자호란을 겪은 뒤 인천의 전략적 가치가 상승돼 월미도에 행궁을 설치하면서 그 비중이 상승하고 있었다. 그 결과 18세기 후반 규장각에서 전국의 호수(戶數)와 인구수를 기록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인천은 원호(元戶) 4,096에 1만4566명(남 7505명·여 7061명), 부평은 원호(元戶) 3,167에 1만1587명(남 6107·여 5480)으로 인천이 부평보다 무려 인구 3000명을 앞서게 됐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미래 인천
광복 후 미군정청은 1945년 10월10일 인천부를 '제물포시'로 바꾸었다. 기존의 '인천'보다 제물포를 선택한 것은 새로운 변화를 꾀하려는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나, 10월27일 제물포시를 다시 인천부로 환원했다. 명칭 변경에 따르는 행정상의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6~7대 인천시장 김정렬은 숭의역을 지금의 제물포역으로 바꾸는 것을 제안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로부터 남구 도화동 일대가 마치 제물포인 것처럼 오해하는 소지를 남기고 말았다. 사라져가는 이름, 제물포에 대한 애착이었겠지만 그 품격이 축소됐음은 물론이다.

인천은 바다의 도시로서, 비류가 정착한 백제의 수도였고 대중국 해상교류의 첫 무대였으며 전근대 사회의 최고 권력인 왕실과 밀접한 고장이었다. 고려시대 7대어향이 그러했고, 조선시대에도 왕비의 외가였다. 인천 개항 후 서구문물이 유입 전파되는 최고 최초의 도시였던 것을 보면 인천의 지기(地氣)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유독 일본인이 많이 살았던 인천은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통해 민족운동의 기치를 올렸던 곳이었지만 '신음'소리도 높았었고, 9·15인천상륙작전은 대한민국을 보존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나 지역사회의 피폐는 엄청난 것이었다. 경인고속도로, 임해 공단, 신항만 등의 건설은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중추가 됐으나 그 또한 후일 많은 사회문제를 동반했다. 오늘의 인천은 대한민국을 회생시키는 1등공신의 역할을 했던 곳이나 '보상없이' 그 희생의 대가도 단단히 치러왔던 곳이다.

오늘날 인천의 성장과 팽창이 현재만의 산물이 아니라, 그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인천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역사와 문화, 소중한 가치가 곧 인천의 미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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