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관 사진가
지난해 가을, 서울의 D여행사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4박 5일간 민통선 투어(tour)를 했다. 23명중에 여성이 5명이고 모두 남성이었다. 마지막 날 저녁 토론을 마친 후 나는 생뚱맞은 문제를 내놓았다. '비자금' 즉 부부의 비자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과, 아내 몰래 한푼 두푼 저축해 둔 것이 소형차 1대를 살만큼 불어났는데 오히려 잡념만 더 생겨나 모두 털어놓고 싶다고 했다. 있어도 고민, 없어도 고민이 되는 게 돈인가 보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을 품위 있게 살아가려면 최소한의 비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구태여 이실직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또한 비자금은 갑작스런 어려움에 처할 때 손쉽고 빠르게 쓸 수가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나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보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몰래 숨겨놓은 돈 때문에 생겨난 불안한 마음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비자금의 주인공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돈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내 얘기가 끝나자마자 어느 공공기관에서 임원으로 퇴직한 분이 그런 것 까지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부부는 한 이불속에 있을 때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만 돌아서면 남이 되기 때문에 촌수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비자금을 유용하게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물론 그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왠지 씁쓸한 마음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물질만능의 세상이 사람들을 무섭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특히 여성분들이 더 적극적으로 비자금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어쩌면 이 시대의 많은 여성들이 남편이 뼈 빠지게 벌어다 주는 돈을 적당히 떼어내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혹을 떼려다 더 부풀려 붙인 꼴이 된 셈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에게 이실직고하고 숨겨놓았던 비자금 통장을 건네주려고 했던 생각을 일단은 접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TV화면을 켜자마자 어느 기업의 총수가 불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하다가 발각이 되어 초라한 모습으로 검찰청으로 끌려가는 장면이 화근이었다. 아내도 옆에서 그 장면을 보는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서 그 장면이 끝나기도 전에 얼른 꺼버렸다. 내 속을 모르는 아내는 왜 갑자기 TV를 끄느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굳이 대기업의 비자금과 비교를 한다면 코끼리와 개미나 다름없다. 사용처 또한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마음이 불안한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진쟁이가 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이었다. 지금까지 쪼들리는 살림살이를 아내 혼자 책임져야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결국 아내를 불러 식탁에 마주보고 앉았다. 나의 돌발행동에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나는 통장 하나를 불쑥 내놓았다. 아내는 깜짝 놀랐다. 우리 살림으로는 꽤 큰돈이었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다. 다행이 늦게나마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우아한 삶보다 마음이 편한 삶을 택한 것에 후회는 없다. 잘 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것 같이 홀가분함은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이었다. 욕심은 버릴수록 더 고귀하며 더 많이 채워진다는 진리를 터득하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