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필 시인·수필가
얼마 전, 국제앰네스티(국제인권단체)가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사업장을 바꾸면 비자 갱신이 금지된, 사실상 '노예계약' 항목에 대한 보완책이 절실하다고 지적하고, 아울러 심각한 인권침해 사례도 발표했다. 현재 25만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우리가 기피하고 있는 자리에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우리 경제에 기여한 긍정적인 역할을 부인할 수 없다. 근년 들어, 그중 5만명 정도가 일하고 있는 농촌지역이 인권 사각지대로 떠오르고 있다. 그 실례를 들어보면, 어느 캄보디아인은 딸기밭에서 일하면서, 아파도 병원에 가기는커녕 월급마저 받지 못했고, 또 같은 나라에서 온 남성이 천 마스크 하나만 쓰고, 농약을 뿌리다 두통에 시달렸단다. 그뿐만이 아니다 베트남 한 여성은 상추밭에 앉았다는 이유로, 술 취한 농장주가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는 비인각적인 행위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이게 무지의 극치요 인권의식의 백치다. 거의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이해와 설득보다는 욕설과 폭력이 효과적 수단이라는 짧은 생각으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국에서 고등학교 이상 배운 20대 젊은이로서, 한국에서 고달픔과 외로움을 참아가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장미빛 미래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그런데 일터의 황당한 경험에 증오심을 품게 하고, 한국의 좋은 이미지에 먹칠을 하게 된다. 사실상 몇몇 고용주에 의해 저질러진 비행이 전 국민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한편 정부가 이주노동자에 대한 불리한 제도를 개선시키고, 인권보호에도 적극 나서야 우리사회가 더욱 건강해지고 삶의 질도 향상되어, 향기 짙은 행복의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60~70년대 열악한 경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졸 광부(63~80)는 7900명 고졸 간호사는 (66~80) 1만여명이 서독에 취업하여, 이들의 피땀 흘린 대가로 오늘날 한국경제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은 공지사실이다. 실제로 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자들이다. 당시 대졸 광부들은 우리사회의 엘리트로서, 전혀 광산경험이 없었기에 현장에서 관리.감독했던 독일인은 애가 터지고 짜증도 났을 것이다. 하지만 '비정하고 야만스런 인권침해는 전혀 없었다'고 그들은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서독 방송, 신문들은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라는 제하로 영상과 기사화하면서 한국의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내줬다. 또한 보수도 우리나라보다 3배 이상 받았다고 한다. 그 당시 한국 경제상황은 어떠했는가. 60년대 우리나라(100달러)는 필리핀(180달러)보다 국민소득이 낮았다. 반세기만에 뒤바뀐 이유는 정치지도자를 잘 만났고, 국민들의 근면성과 절약정신, 게다가 '잘 살아 보자'란 기치아래 '새마을 운동'에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현재 우리가 먼저 경제적 주름살을 폈다고 우리보다 못산 동남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게 차별과 멸시를 한다는 것은 민주시민의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한때 미안마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국가들이, 우리나라보다 사회도 안정되고 잘 살았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이 입증해주듯이 영원한 부국도 없고, 영원한 빈국도 없다. 오늘날에 풍요를 구가하던 국민들도, 훗날에 외국으로 품팔이갈 수 있지 않는가.
우리가 그들보다 오래도록 잘 산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또 특정 국가만이 풍요를 한없이 만끽할 수 없는 게 세상이치다. 그래서 일까. 항간에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자주 등장된다. 이를 직역해보면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 즉 '상대편의 처지에서 헤아려 보라'는 것이다. 내 자신도 끝까지 잘 살고 늘 행복할 수 없는 게 인간사다. 나보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관심과 배려를 해주면 상대방은 고마워한다. 또 따뜻한 말 한마디에도 힘이 솟고 감동할 것이다. 향후 우리국민들도 이주노동자들을 형제처럼 자식처럼 보살펴주고 위로해주면, 그들이 귀국 후에도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