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인천' 쓰고, '쉼표' 하나 찍고, '한국근대문학관'이라고 연이어 써 본다. 좀 어색해 보인다했다. 인천과 한국근대문학관과의 조합이 뭔가 부실해 보였던 것일까. 언필칭, 한국근대문학관을 떠올리면 인천, 인천을 떠올리면 근대문학이 연상될 때도 됐는데, 우리나라 문학계의 이데아 나무는 인천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거국적 '근대문학관'이란 열매에 동공의 폭을 확장하는 이유는 뭘까.
얼마 전, 도종환 시인 겸 국회의원과 서울대 산학협력단 주최로 서울에 '국립한국근대문학관' 설립을 지향하는 심포지움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렸다. 외형상으로 IMF로 추진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와 실마리를 잡겠다는 취지로 다각의 토론자들이 국립근대문학관 설립 타당성을 한 올 씩 풀어내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국립'과 '한국'이라는 얼굴이 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고, 기존에 있는 것도 못 살리는 처지에 새로운 것을 또 만들어 보겠다는, 우리사회 저변에 깔린 '새 것 증후군'의 표징을 보는 것 같아 옆구리 찔리듯 아려왔다.

전국적으로, 유명 작가의 이름을 표방해 문학관을 건립하지 않은 도시가 없다. 인천만이 유일하게 '한국근대문학관'이란 간판을 걸고 인천정신이라 일컫는 '해불양수(海不讓水)'의 기지로 문학관을 설립했건만, 도무지 씨알이 안 먹히는 형세로 보였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을 피력할 '용기 있는 자'도 '꼴통 같은 작가'도 없는 판국이다 보니 소주잔에 물 타듯 밍밍한 자존심만 쓸어 넘기다가 취해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시민의 혈세 한 방울 씩 모아 어렵게 세웠지만, 시민의 문학적 자존감과 문화 향유의 저변확대 기대에는 여전히 일천한 우물 같은 느낌이었다. 원주의 박경리 문학의 집, 부산의 요산 김정한 문학관, 목포의 박화성 문학관, 전주의 최명희 문학관 등은 지역 정서를 극대화 하고 자긍심을 돋우는 데에, 시민의 혈루가 투여된 대표적인 공간들이다.
인천 또한 그러한 열망이 보태지고 재기 넘치는 재능꾼들이 합세해 작지만 의미 있는 공간을 일궈냈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여타의 그 것처럼 문화적 인자들에 초점을 맞춘 문학관만 존재할 뿐, 실험적이며 유기적인 감동을 선사하는 즐거움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말이다.
무카미 하루끼, 다자이 오사무,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요리와 음료를 쉴 새 없이 나르는 카페 분단(BUNDAN)은 일본근대문학관 내에 있다. 고마바 도다이마에(駒場東大前) 역에서 15분 쯤 걸었던 길에서 느꼈던 고즈넉함을 고스란히 어깨에 걸치고 들어서는 순간, 재밌다 신기하다 즐겁다 먹고 싶다 나도 한 번 앉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느닷없이 발동한다. 그러고 보니, 필자의 삶 한 자락에 모델처럼 서 있는 '인천, 한국근대문학관'이 오버랩 되고 있었다.
공공의 공간으로서 상징성과 의미, 진중한 근대문학의 뿌리와 기둥을 공통으로 드러낸 것 말고는 내세울 게 그렁그렁 하기 때문이다. 국립한국근대문학관을 추진하는 주체가 2만 8천여 건의 근대문학 자료를 수집해 기세를 높여나가고, 일본근대문학관 1층의 '분단' 카페에 앉아 저들이 만든 기린 비루(Beer.ビ?ル)를 마시며 노벨 문학상을 즐기고 있는 참에, 그저 근엄함만이 우리의 무기가 될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