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서울 관문 자리 … 근대·침략 양면성
[인천일보 연중기획] 서울 관문 자리 … 근대·침략 양면성
  • 김진국
  • 승인 2014.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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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체성 찾기] 강덕우의 인천역사 원류를 찾아서
8> 개항 후 인천의 변화ⓛ
▲ 인천부역 축소후의 변모.
▲ 일본영사관. 이후 이사청을 거쳐 인천부청.
인천은 개항과 더불어 그 중심 무대와 역할 면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변화하게 됐다. 개항장의 확대와 개항장을 통한 국내외 무역의 활성화, 그리고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거주는 이 시기 인천의 도시 위상을 크게 바꿔 놓았다. 내륙에 위치한 관교동으로부터 해양에 면한 제물포로 중심무대가 바뀌고, 지방행정 기능에서 '세계교역 기능'으로 변모하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국내적 여건에 의해서라기 보다 제국주의 열강의 요구에 따른 세계 체제로의 편입이었다는 점에서 인천의 도시 발달은 태생적 한계점을 지니게 됐다.

▲구체제 개편과 변천
인천은 개항장에서 도시화의 길로 나아간 지역 가운데 가장 발달된 도시를 형성해 갔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인을 중심으로 한 도시가 아니라 일본인 중심의 도시라는 점, 아울러 그것은 근대성과 침략성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측면이다.

한국 사회는 조선 후기 이래 심화된 사회·경제적 여러 모순으로 인해 향촌 사회의 효과적인 통제와 안정, 그리고 이를 통한 국가 재정의 확보를 위한 지방제도의 개혁이 구상되고 있었는데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을 계기로 사회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제도개혁을 단행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갑오개혁에서의 지방제도 개편은 짧은 시일에 근본적인 여러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그 부작용도 심각했는데,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이후 전국적인 의병 봉기로 인해 지방제도의 원활한 운영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철도가 놓이기 이전에는 여전히 강화해협과 한강이 주요 교통로로서 기능하는 한편, 인천에서 서울로 통하는 육로로서 신작로(개항로)가 개설됐지만, 1900년 경인철도의 개통 이후에는 해로와 육로의 역할은 크게 쇠퇴했다. 명실공히 인천은 무역상, 외교상, 교통상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돼 한강 서부지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했을 뿐 아니라 수도 서울의 관문으로서 자리잡게 됐다.

한편 1905년의 을사늑약에 의하여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1906년 1월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해 한국정부의 행정을 감독하고, 각국의 공사관과 영사관을 철폐했다. 그리고 일본영사관은 이사청(理事廳)으로 개편했다. 이사청에서는 영사관의 업무, 개항장 감리의 업무, 그리고 기타 지방행정의 지도감독 업무를 맡았다. 인천 이사청은 경기도 서부 일대, 충청도 서북부 일대, 황해도 남부 일대를 관할했다.

일제는 통감부 설치와 함께 지방제도의 전면적인 개편을 시도했다. 1906년 지방제도조사위원회가 설치돼 옛 제도를 조사하고 개편방안을 마련한 뒤 이해 10월 지방제도의 개편에 착수했다. 군 구역을 재조정하고, 행정구역 지위의 승강을 실시했는데, 개항장 소재지의 군을 부(府)로 개칭함으로써 인천은 다시 부로 승격됐다. 인천감리서가 폐지되고 그 업무는 인천부에 인계됐다.

그런데 1910년을 전후로 경인철도 개통에 따른 주요기관의 서울 이전, 경부·경의선 개통, 중국 및 구미상인의 철수에 따른 대중무역 쇠퇴, 대일무역 중심의 부산이전 등으로 인천의 상권이 약화되면서, 개항 이래 독자적인 발전을 해왔던 인천은 서울의 관문으로 성격이 바뀌어 국내의 도시체계 속에 서서히 통합되기 시작했다.
이후 인천은 대외무역 의존에서 벗어나 상공업도시로 발전하는 전기를 맞게 됐다. 아울러 일본인들에 의해 본격적인 도시개발이 진행됐다. 대한제국시기의 인천부윤은 해임되고 일본인이 새로운 인천부의 초대 부윤으로 임명됐다. 종래 감리서에 있던 인천부청은 폐지되고 새로운 인천부청이 이사청이 있던 일본영사관 건물로 입주했다.

▲인천 부역(府域) 축소·부천(富川) 탄생
일본은 강점 직후 과도기적 지방통치기구를 확립했는데, 총독정치가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히자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를 토대로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혁을 단행했다. 우선 1914년 3월1일 군과 면의 통폐합을 실시했다. 물론 이것은 통치비용의 절약과 행정상의 편의에 따른 것이었다. 이어 4월1일을 기해 서울·인천·군산·목포·대구·부산 등 12개 지역에 부제(府制)를 실시했다.

이 당시 인천부로 편입된 곳은 외국인거류지, 구일본거류지, 중국인거류지, 부내면·다소면의 화도동·수유동·신촌리·송림동·송현동·장천리 일부·독각리 일부로 주로 조계지역의 주변이었고, 구인천부의 중심지였던 문학동은 부천군으로 편입됐다. 이로서 인천부는 크게 축소됐고 나머지 지역은 부평군과 합해 '부천'군으로 신설됐는데, 부평의 '부'(富)자와 인천의 '천'(川)자를 합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농촌지역과 시가지지역을 분리시킨 것으로 이것은 비단 인천부만의 현상이 아니라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우선 부(府)로 승격된 곳은 예전부터 일본인들이 다수가 거주하고 있어서 그들의 자치단체인 일본인거류민단이 설치됐던 곳이었다. 이후 총독부는 각 지방에 하천·도로·항만·상하수도·전기사업·철도 등 각종 복지시설을 건설할 때도 언제나 부를 최우선순위로 배정했다. 결국 부제를 실시하게 된 목적은 일본인들만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한국인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를 분리시킨 것이었다.

결국 한국인의 전통적인 생활권역과 공동체 질서를 파괴·약화시키는 한편, 일본인 거주지 중심으로 도시시설을 집중 투자해 일본인에게만 유리한 일본인 중심의 도시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인천부는 완전히 일본인 도시로 변했고, 한국인은 각종 생활편의시설에서 완전히 소외·격리됐던 것이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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