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산책 ▧
525807_76167_0653.jpg
언제부턴가 '염치'라는 단어가 휘장처럼 이마에 각인돼 있음을 느낀다.

나이 들어가는 증거라며 놀림을 받지만 억지시비에 얽혀 초라한 꼴을 당하지 않는 걸 보면, 꿍쳐둔 염치는 그런대로 쓸 만한 처세임이 증명된다.

격렬했던 지방선거가 끝났다. 그 과정은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양상이었지만 당락은 여지없이 존재하고 말았다. 하지만, 반 쯤 들어찬 물 잔처럼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만이 설왕설래할 뿐 전반의 미덕이 부재했다는 게 인천시민 대다수의 생각이다.

막전막후 상황은 이러한 존재감에 물음표를 던지게 했다. 똥 누기 전후, 영화보기 전후, 밥 먹기 전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경계를 경험한 인간만이 갖는 '줏대의 떨림 현상' 때문이다.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그러한 현상을 거쳐야 비로소 현재성을 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상식을 거스르는 집단적 쏠림과 보신주의에 빠져 의리를 저버리는 일 등은 사람이 근본인 사회정의의 표적이 된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송영길 시장 체제에서 유정복 당선자 체제로의 전환 시점에 '살생부'니 '굴욕적 자리 지킴' 등의 말들이 괴이한 낭인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어서이다. 힘센 권력과 호화스런 밥그릇이 찰나의 행복은 주겠지만 영원할 수 없음을 누구나 다 아는 바. 이 마당에서 개기는 사람과 기생하려는 사람 모두 추해 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독선은 아닐 것이다. 추함을 더욱 추하게 만드는 배경은 결국 욕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고 사람 됨됨이를 중시하고, 민주적 절차와 합리성에 바탕을 둔 창의적 인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일갈하면, 대번에 '꼴통' 이나 '천연기념물'로 취급을 받을 게 분명한 현실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보편적 '골든 룰'을 가슴에 지니고 있으면서 현실의 다름을 방치하는 사회는 이미 병든 사회이다. 아울러 열거한 '인재의 조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인천 지역사회 곳곳에서 노를 부여잡고 있는 것 또한 골병 든 사회의 단면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판단의 잣대가 패이고 닳아서 그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지경이 됐다는 점이다.

예(禮)라는 글자는 설문해자를 근거로 파자해 보면, 하늘에서 뭔가가 내려오는 모양을 표시한 시(示) 자와 굽이 높은 그릇을 의미하는 풍요로울 풍(豊) 자와 결합돼 있다. 상당히 고매한 행위를 상징하는 글자이다. 마치 제례를 올리는 과정처럼 반복적인 훈련과 반성, 겸허한 실천을 통해야 비로소 예에 다다를 수 있다는 의미소인 것이다. 시공을 초월해 우리 사회 성원들이 갖춰야할 덕목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는 그렇지 않다. 필자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마비 증상 때문이다. 실례로, 필자가 20년 간 문화단체의 대표로 이름을 걸고 있어 보니, 대표직에 대한 우쭐함이 능력에 비해 과대포장된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초발심을 잇지 못하는 현실적 문제는 다각도로 접근해 왔다. 운영자금, 일꾼의 육성,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것 등 모든 면에서 '흘러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인천은 흘러야 비로소 제 생명력을 갖출 수 있다. 막힌 곳이 있으면 뚫어야 하고, 지나치게 유속이 빠르면 제어 시스템이 가동돼야 한다. 말꼬리 흐리며 두루뭉술 허공난상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상처의 깊이를 될 수 있으면 줄이자는 속내가 있기 때문이다.

항간에 인천문화재단 내부에 볼썽사나운 조짐들이 불거져 나온다고 한다. 이에 필자 또한 허울뿐인 '운영위원장'직을 내 놓을 참이다. 흘러야 살 수 있고 '염치'를 스스로 느끼지 않는 자리 보존은 꿀 좋다고 매일 약으로 먹는 고충을 알기 때문이다.

/이종복 터진개 문화마당황금가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