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수의 행복한 노년
우리가 결혼했던 예식장 건너편 요양병원에서 어머니는 와상환자로 임종했다. 이제 우리는 장남과 딸을 낳고 빈 둥지를 맞을 노후기를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가족을 맞아들였던 웨딩홀, 그리고 어머니가 투병했던 요양병원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치 우리의 일상처럼 기쁨과 슬픔을 이어갔다. 아직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머니는 그곳에서 삶과 죽음의 공존을 느꼈을까.

봉양의 대안으로 떠오른 요양병원은 부모 세대의 전유물로서가 아니라 순환의 고리처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더욱 불만과 부정적인 단면들을 실토하게 되고, '9988234'가 우화의 소재가 아닌 현실이길 희망한다.

어느 날 어머니는 외출에서 쓰러졌다.

장기요양 3등급으로 요양보호사의 간병 재가생활마저 불가능해졌다. 근근이 의복을 갖춰 입는 일이나 용변을 스스로 보는 일도 지나간 추억에 불과했다. 손으로 밥을 움켜쥐는 일도 있었다. 손과 발이 묶이기도 했다. 대학병원에 장기 입원했던 어머니는 요양병원으로 옮겨 1년여를 지내고, 시설등급을 받은 지 수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요양시설 입소를 호소했던 그 때를 기억한다.

자식의 봉양 의지에 국가사회의 보호를 받게 되면 어머니의 황혼이 훨씬 행복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경제 생활과 학업에 집중해야 하는 2대, 3대 가족구성원들의 가정 건강성을 포기해야 하는 우려도 앞섰다. 한계를 추정할 수 없는 부모 부양의 특성을 감안하면,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인력의 도움을 받아 가족해체의 위기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에서였다.

요양시설 입소 판정 등 현실은 매우 까다롭다. 요양보호는 가정 경제의 하향 이동을 억제하고, 가족의 사회심리적 안정을 지원할 수 있는 사회제도라는 명분과 취지가 올바로 정립될 수 있도록 확대·개선돼야 한다.
초여름 어느 날, 둔탁한 요양병원 자동문이 덜컥이며 열렸다. 실내화를 갈아 싣는 현관의 틈새 바람 사이로 부는 묘한 악취에도 익숙했다. 일광욕이라도 하듯 칸칸이 신발장은 입을 벌리고 신발 뒷꿈치들을 내보였다.

10층 이상을 오가는 한 때뿐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 힘들어 좁은 계단을 뛰어올랐다. 어느 요양병원이냐고 물어오면 '옛날 ○○모텔'이라고 대답했다. 좁은 복도, 앉고 서기도 좁은 병실, 공동 화장실…. 지금 생각하니 화재라도 난다면 인명구조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심야 시간에 임종을 맞은 어머니 앞에서 소리 내어 울 수 없었다. 희미한 의식에 한 가운데 있는 병실의 많은 입원 환자는 매일 죽음을 목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임종실 하나 없는 보잘 것 없는 죽음의 가치 앞에서조차 인맥을 자랑하며 '장기 이용'을 권장하던 병원장과 사무장들은 얼마나 자성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항상 우리는 죽음보다 삶 쪽에 큰 부등호를 그리며 살아간다. 가끔 삶과 죽음이 따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인생은 조금 더 여유롭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까이 마주치는 개인적인 죽음의 현실보다 허망한 절명의 사건·사고를 더 많이 접하게 된다. 국가사회는 생명의 존중으로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죽음에 대한 공공성이 강조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간호조무사 1명을 포함해 29명의 노인 사상자를 낸 전남 장성의 요양병원 화재는 안전시설을 갖추지 않은 노인시설의 전국적인 현실을 보여준 표본일 뿐이다.

간병기 새로운 주거공간에 적응하는 일은 매우 힘든 과제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선진국에서는 요양병원이나 실버타운을 선호하지 않는다. 평생 살았던 집에 머물기를 바란다. 장기 간병 시스템도 시설보호에서 '살던 집에서 나이 들어간다'는 의미의 AIP(Aging in Place)를 강조하는 재가보호 중심으로 정책 전환에 노력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요양시설의 관리·감독에 엄중한 잣대를 세워야 한다. 한편으로는 요양병원 수준으로 간병수발 서비스 분야도 강화해 주거의 이동 없이도 수준 높은 간병보호를 받을 수 있는 복지국가의 디딤돌을 하나 하나 쌓아 나가야 한다. '아흔아홉까지 팔팔하게' 살아야 하는 시대다.

/인천금빛평생교육봉사단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