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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이 되면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필자는 어릴 적 인천서림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상업중학교에 입학했는데, 3학년 때인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발발한 며칠 뒤 인천은 북한군에게 점령을 당했고, 북한군은 인천의 중학교 상급학생들을 인민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마구잡이로 전선에 보내고 있었다.

이후 우리 국군과 유엔군의 9·15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천이 수복됐을 때 인천학도의용대가 조직됐다.

1950년 12월18일 인천학도의용대는 고향 인천을 뒤로 하고 마산까지 남하했다. 16살이던 필자는 육군에 입대해 수도사단에 배치됐다. 강원도 향로봉 전투, 금화지구 전투,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등 각종 전투에 참전하면서 4년을 보냈다.

필자가 20살에 제대했을 때 집 형편이 어려워 복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 때 필자는 부모님 슬하에서 편안히 공부를 하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왜 바보처럼 군대에 갔을까'라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너희들이 부모님 보호 하에 편안히 집에서 공부를 할 때 나는 전쟁터에서 나라를 지켰지'라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럼에도 전쟁 때문에 공부할 시기를 놓치고 살아온 나로서는 언제나 공부를 하지 못한 한을 품고 살아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을 불러 앉히고 처음으로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내려준 '6·25참전용사증서'를 내보이며 아버지가 어릴 때 겪어온 6·25전쟁 이야기와 인천학도의용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이야기 끝에 한국전쟁 때 내가 속했던 인천학도의용대를 지휘했던 간부나 선배들은 어째서 여지껏 아무 기록을 남기지 못했는지에 대한 얘기도 흘러나왔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아들은 "아버지의 한이 담긴 6·25 인천학생들의 역사를 제가 찾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들은 '인천학도의용대의 활동과 6·25참전사'란 표지가 붙은 계획서를 만들어왔다.
1996년 9월15일 아들과 필자는 인천학생 6·25참전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아들과 함께 찾아낸 성과물이 상당량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왜 아들에게까지 이런 일을 시켰을까'라는 후회를 하기도 한다.

그렇에 어려운 역사찾기를 한 지도 어언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난관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400여 명과 면담하고 직접 참전했던 학도병 출신 196명과는 인터뷰 녹취록에 기록을 해놓은 상태이다. 이 과정에서 인천학도의용대의 규모, 활동내용, 군입대과정, 개인별참전과정, 208명의 전사자 발굴 등 많은 성과가 있었다. 개인묘지에 묻혀 있던 김우종(해병대), 송용식(육군) 전사자 묘지를 국립묘지로 옮기는 이장사업도 벌였다.

지금 필자는 인천학생들이 6·25전쟁에 참전했던 내용들이 담긴 인천학생 6·25참전기념관을 만들어 중구 내동에서 운영하고 있다. 이 기념관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천과 국가를 위해 만든 기념관이다. 인천시나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 한다는 생각으로 지은 소중한 기념관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어린 목숨을 바쳐 싸운 학생들을 위해 지은 이 기념관을 인천시민들이 아끼고 사랑해주셨으면 좋겠다.

/이경종 인천학생 6·25참전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