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를 찾아 달리던 버스는 어느 고즈넉한 도로의 가장자리에 멈춰섰다. 도로를 경계선으로 왼쪽에는 넓은 논이, 오른쪽에는 밭과 초원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서고성의 옛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다만 마을 어귀에 「서고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고루한 비석만이 남아서 당시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듯했다.

 서고성은 발해의 5경중에 하나인 중경 현덕부가 자리 잡은 곳으로,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논으로 뒤덮여 있지만, 그곳에서 고구려의 후예들이 모국의 기상을 이어받아 영향력을 지속시켰다고 생각을 하니 발해라는 국가를 좀더 알고 싶다. 서고성이 발해의 수도가 된 것은 742년에, 다시 말하면 제3대 문왕시기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서고성은 기온이 좋고 모작기가 길어서 농사가 잘 되었으며 또 해란강이 있어 수량이 많아서 수리관개 사업을 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한 나라의 경영을 위해서는 경제 발전이 필요하고, 그 시대의 경제 핵심은 농업이었으니, 농업 경제를 잘 발전시키자면 서고성이 적합했기에, 이것이 서고성을 수도로 삼게 된 주된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고성이 자리했던 넓은 논을 바라보며 발해의 시대상을 그려보는 정도로 만족을 하고, 우리는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으로 우리가 찾아간 곳은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였다. 평소 흠모했던 시인이라 무척 긴장이 되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기를 원했던 시인의 삶과 그 속에서 엿보이는 지식인의 고뇌는 한없이 나약한 나의 자아에 힘이 되어주곤 하였다.

 윤동주 시인이 유년기를 보냈던 학교의 모습은 여느 학교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학교를 둘러 본 우리는 해란강으로 향했다. 해란강은 우리 선조들이 제일 먼저 정착한 곳인데, 그래서 그런지 강의 모습은 초라해 보였지만 뭉클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장춘으로 향했다. 이 역시 기차를 타고 이동을 했는데, 다들 이력이 난지라 큰 불편함은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음날 새벽 우리는 장춘에 도착해 세면과 식사를 한 후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위황궁과 영화제작소를 관광했다. 관광일정을 마친 후 우리는 다시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출발했다. 대개 이동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잠자는 시간을 이용해 이동을 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짧은 일정동안 참 많은 곳을 다녔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든 강행군이었던 것 같다.

 하얼빈 역에 도착한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역사적 사명을 다했던 장소를 찾아서 기념 촬영을 했는데, 우리에겐 유서 깊은 이곳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기념비마저 세워져 있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하얼빈에서는 우리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하얼빈 공대를 방문하고 그곳 대학의 공기를 살펴보았는데, 규모나 시설 면에 있어선 우리보다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기업의 이미지로 탈색화되고 있는 한국의 대학을 면면이 따져볼 수 있는 계기가 된 하루였다.

 하얼빈에서 하루를 보낸 우리는 수도인 북경으로 출발했다.

북경은 3천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도로 1천1백여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대도시이다. 그만큼 다양한 문화재가 숨쉬고 있는 곳이었는데, 세계 7대 불가사의이자 인류 최대의 문화유산이라 칭해지는 만리장성을 첫 탐방지로 선정했다.

 만리장성은 달에서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로, 총 길이는 6천㎞가 훨씬 넘는다고 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왜 이런 장성을 축조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이유였다. 가장 큰 이유가 흉노족을 중심으로 한 북방민족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게 가장 타당한 사실로 알려지고 있다.

 만리장성의 일부인 팔달문 주위를 둘러본 뒤 우리는 마지막 탐방지인 자금성으로 향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배경이 되었던 자금성은 명, 청시대의 황제가 살던 성으로 동서 750m, 남북 1천m 규모의 장방형 건물인데 그 안에 있는 방이 9천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러한 중국의 문화들을 보면서 세계가 자신들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었다.

 일주일간 중국을 돌아보면서, 그 속에서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하나 하나 찾아다니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가 나아갈 좌표는 무엇이며, 근간의 정신은 무엇인지, 고구려 문화유적을 탐방하면서 일말의 해답을 얻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라는 것은 과거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이긴 하지만 단순히 과거로서 만의 의미를 지닐 때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 부르지 않는다고 배웠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오늘의 우리 속에 생생히 살아 있고 나아가 우리들의 미래를 밝혀 줄 수 있는 의미를 지닐 때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역사라 이름한다는 말이다.

고구려의 흔적들이 던져주는 의미와 가치들을 새삼 되새겨 보며 지금까지의 지난한 탐방기를 마칠까한다. 끝으로 함께 고구려를 찾아 중국의 곳곳을 헤집고 다닌 우리 탐방단 식구들께 고생하셨다는 말을 전한다.

양영환·인천대 교지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