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희·홍정호 등 1992년 올림픽 금메달 주역
조치효·박정진 등 남자 국가대표 꾸준히 배출

핸드볼. 대한민국 올림픽출전사상 단체구기종목 첫 금메달(1988년 24회 서울올림픽·여자핸드볼), 단체구기종목 사상 첫 올림픽 2연패(1992년 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여자핸드볼), 2014년 인천아시아경기대회 가장 확실한 단체구기종목 금메달 후보(남·여 핸드볼). '우생순(우리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대표되는 한국 핸드볼의 화려한 이력 뒤에는 인천이 있다.

특히 한국의 단체구기종목을 대표하는 핸드볼 인사들은 인천을 핸드볼도시로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핸드볼의 탄생과 활성화, 올림픽에서의 전성기를 달릴 때 인천의 수많은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무대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 많은 핸드볼 지도자와 선수들은 '인천'을 한국핸드볼의 메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유일도시라고 입을 모은다. 흔히들 인천을 '야구도시'로만 알고 있으나 여기에 '핸드볼 도시'라는 별칭을 추가해야하는 셈이다.


▲ 인천핸드볼의 태동과 중흥

인천의 학교에서 핸드볼부 창단은 1960년대 초중반부터로 보고 있다.
인천핸드볼의 원로인 홍광일 인천핸드볼협회 고문(61)은 당시 "숭의운동장 옆 소구장 맨땅에서 송구라는 11인제 경기로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홍 고문 자신도 북인천상고에서 핸드볼을 시작해 인천교육대학에서 핸드볼선수로 활약했다. 당시 국내교육대학끼리 체육대회가 있어서 각 교육대의 운동부가 활성화되던 시기였다. 인천교육대학은 여러 종목 가운데 핸드볼부가 강세를 보였다.

홍 고문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한국국가대표 남·여 선수(주전선수 7명) 가운데 인천출신이 절반을 넘을 정도로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인천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맹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 초등학교 핸드볼 팀이 무려 10개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남자부 부평남초, 여자부 송현초, 구월초 2개교가 있다.
홍 고문은 "현재 남자부에서 부평남초가 잘하고 있지만 이전에는 부평서초와 산곡초가 1980년대까지는 더 잘했다"고 말했다.

이후 1984년 홍 고문이 교사로 있던 부평남초에 핸드볼 부를 창단했고 이후 전국무대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이며 상대적으로 다른 초등학교 핸드볼부가 해체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는 것이 홍 고문의 설명이다.

여자부에서는 구월초가 가장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구월초가 1980년 이후 서흥초가 창단하면서 지역 대표권을 뺏겼고 서흥초가 해체된 이후 송현초가 새롭게 창단했다. 송현초 창단은 전통의 구월초와 함께 인천여자핸드볼의 경쟁구도로 이어지고 있다.

홍 고문은 앞서 인천핸드볼이 태동한 지난 1960년대 중반 당시 맹정수감독이 있던 영화여고가 전국최강으로 군림했다고 말했다.

당시 남자고등부 핸드볼 팀도 북인천상고와 송도고, 인천기계공고, 대헌고, 인천고 등 5개교가 있었다고 홍 고문은 말했다.
그러나 북인천상고는 창단한지 얼마 안 돼 인천고로 흡수됐고 송도고는 농구가 워낙 강세여서 핸드볼부가 빚을 보지 못했다. 기계공고도 사양길로 갔고 대헌고는 임규하(53·1984년 미국LA올림픽 국가대표) 인천핸드볼협회 전무와 이승재(52) 인천도시개발공사 감독을 배출한 이후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한 채 해체됐다.

영화여고와 함께 현존하는 인천 최고의 핸드볼 팀으로는 인천여고가 있다. 인천여고 핸드볼이 언제 창단했는지는 인천핸드볼협회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지만 1960년쯤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후 1987년 선화여상(현 비즈니스고)이 팀을 창단하면서 여고부는 인천여고와 선화여상의 경쟁체제로 이어지고 있다.

홍 고문은 "인천핸드볼은 여자부가 남자보다 뛰어난 선수들이 많이 나왔고 이는 대표선수의 성적으로 그대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 인천핸드볼의 영웅들

대한핸드볼협회에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인천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한 기록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예선전에서 인천시청 여자핸드볼의 김옥화(52)와 윤병순(47), 김순숙(53·부평서초-부평여중-안양여고 졸업) 등 3명이다. 김옥화 등 선수들은 2차에 걸쳐 치러진 모스크바올림픽예선전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김옥화 등은 동서냉전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가들이 모스크바 올림픽 출전을 거부하면서 올림픽 본선무대출전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4년을 절치부심 기다린 김옥화와 윤병순 외에 김명화(46), 이영자(46) 등 4명의 인천시청 선수들은 마침내 1984년 LA올림픽에 출전해 은메달을 따냈다. 당시 올림픽에서 맹활약한 김옥화를 표본으로 삼아 핸드볼에 입문하는 여학생들이 수없이 늘어나면서 김옥화는 인천핸드볼의 영원한 영웅이 됐다.

김옥화를 인생의 스승으로 생각했던 후배인 한선희(37·문학초-인화여중-선화여상), 홍정호(35·구월초-상인천여중-인천여고), 이호연(39·서흥초-상인천여중-인천여고)은 1992년 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올림픽출전사상 첫 단체구기종목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는 주역으로 활약했다.

홍정호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이어 1996년 26회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 2008년 29회 베이징올림픽 동메달까지 한국 여자핸드볼 신화의 중심에 우뚝 섰다.

26회 애틀랜타에서는 홍정호와 한선희 외에 김랑(36·구월초-상인천여중-인천여고), 조은희(35·서흥초-상인천여중-인천여고), 이상은(35·구월초-인화여중-선화여상) 등 무려 5명의 인천선수가 출전해 은메달을 따냈다.

2000년 27회 시드니 대회 때도 한선희, 이상은 외에 김진순(31·서흥초-인화여중-선화여상), 이정영(35·간석초-상인천여중-선화여상) 등 인천출신선수와 인천연고인 제일생명(현 벽산건설)의 오영란(38), 박정희(35) 등 무려 6명의 인천선수가 출전해 4위를 차지했다.

우생순 신화가 만들어진 2004년 28회 아테네대회에서는 오영란과 문필희(38) 등 효명건설(현 벽산건설) 선수와 이상은 선수가 출전 은메달의 기적을 일궈냈다.

지난 2008년 29회 베이징에서는 문필희, 김온아, 오영란, 김남선 등 벽산건설 선수와 송해림(25·서흥초-인화여중-선화여상-대구시청), 홍정호 선수가 대표 팀으로 출전 동메달을 획득했다.

남자부는 임규하(산곡초-부평동중-대헌공고) 인천시핸드볼협회전무이사와 임영철(50) 벽산건설 감독이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지난 1984년 LA올림픽에서 첫 본선무대를 밟으며 11위에 오르는 신기원을 이뤘다.
이어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냈고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효성중-정석항공고를 졸업한 조치효(40)와 이선순(41)이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해 6위를 차지했다.

남자대표팀은 이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예산탈락 한 것을 제외하고는 꾸준하게 본선에 진출하고 있으나 여자에 비해 성적 면에서 다소 열세에 있다.

남자대표팀은 현재 효성중-정석항공고를 졸업한 한경태(35), 박정진(34) 선수가 올림픽대표로 출전했다. 여기에다 지난 2006년 7월 인천 연고로 창단한 인천도시개발공사 소속의 강일구(34)와 박찬용(30) 등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인천남자핸드볼도 여자핸드볼 못지않은 명가를 이루고 있다.

/백범진·정보라 기자 bjpaik@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