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회인으로서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눈을 즐겨하는 것은 비단 개와 어린이들뿐만이 아닐 것이요, 겨울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히 고요한 환호성을 소리 높이 지르는 듯한 느낌이 난다."
"부드러운 설편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지릴 때, 우리는 어찌된 연유인지, 부지중 온화하게 된 색채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어젯밤에 잘 적엔 인생의 무의미에 대해서 최후의 단안을 내린 바 있었다 하더라도, 적설(積雪)을 조망하는 이 순간에만은 생(生)의 고요한 유열(愉悅)과 가슴의 가벼운 경악을 아울러 맛볼지니…"
1960년대 중반 고교 시절, 국어시간에 배운 김진섭 선생의 수필 '백설부'의 일부분이다. 1939년 '조광' 지에 발표한 글이니까 그로부터 25~6년 뒤에 읽은 셈이지만 그때 눈에 대한 일반 정서도 그랬다.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심이라고 해 봤자, 지금의 중구, 동구 일대를 가리켰던 무렵이어서 눈 내리는 날이면 도시는 일순 정적에 싸여 답동성당 종소리가 은은히 들리고, 먼 데서 개들이 짖어 한밤을 지켰다.
그 무렵엔 눈이 웬만큼 쌓여도 '대란'은 없었다. '눈 폭탄'이라는 모욕(?)도 받지 않았다. '백설부'에서 예찬 받은 바와 같은 순수 백설(白雪)로, '완전한 질서, 화려한 장식, 신성한 정밀(靜謐)'을 통해 제 '마음을 엿듣도록' 했던 것이다.
저마다 차를 끌고 사방천지를 바삐 나다니는 세상이 됐지만, 문득 옛 시절이 그리워진다.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