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중국기행 / 역사의 아픔이 배어 있는 도시, 항주와 서호 1
▲망명조정(亡命朝廷), 남송(南宋)
"예로부터 강남의 명당으로 항주(杭州)를 최고로 여겼다. 절강성 북부에 위치한 항주는 서호(西湖)를 등에 업고 전당강(錢塘江)을 서쪽으로 낀 채 남방의 요충 역할을 해 왔다. 중국의 6대 고도(古都) 중에서도 풍경이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 바로 항주다."
항주를 소개하는 대부분이 '지상에는 항주와 소주가 있고, 하늘에는 천국이 있다'는 식으로 이곳을 풍요롭고, 풍류를 즐기기에 알맞은 곳으로만 소개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아름다운 서호가 있어 유람선에 올라 주위의 풍광을 바라보면서 시를 짓고, 원림을 가꾸어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梅妻鶴子)'으로 생각하는 임포(林逋, 967-1028) 같은 사람이 은둔하는 지역만은 아니었다.
나는 항주에 갈 때마다 이곳이 많은 관광객이 들끓는 단순한 유락지(遊樂地)가 아니라고 안타깝게 생각하곤 했다. 근현대사를 살펴보더라도 지난 1937년 일본군에게 쫓긴 한국 상해임시정부가 항주로 정부를 옮긴 바가 있다. 새얼문화재단 역사기행단이 독립군 유적지를 찾아 항주 시내를 누비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좀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송나라의 역사를 떠올려보면 항주는 저항의 도시이자 처절한 투쟁의 도시였다.
"상황(上皇)이 죄를 지어 황위를 신(臣)에게 물려주었는데 미천한 이 몸이 명을 받들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상황은 아버지 휘종(徽宗)이고, 신은 아들 흠종(欽宗) 자신이다. 두 부자가 금나라 장수 앞에 무릎을 꿇고 생명을 구걸한다. 금나라는 송 조정에게 근괄(根括)을 시행토록 명한다. 근괄이란 백성들로부터의 철저한 수탈을 의미한다. 일차는 6일, 2차는 18일 동안 성안의 종실, 외척, 환관, 관료, 승려, 기생집에 이어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집을 수색당하고, 금과 은, 비단, 보물 그리고 옥새에 이르기까지 돈 될 만한 것은 모두 가져갔다.
황명을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던 관료와 군인들은 금나라에 바치기 위해 자기 백성들을 살해하고, 불을 지르고, 약탈을 저질렀다. 백성들에게 그토록 잔인무도한 짓을 저질렀던 사람들은 금나라 군사가 아니라 바로 '우리 편' 송나라 병사들이었다. 얼마나 처참한 광경이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송사(宋史)에서 말하는 정강의변(靖康之變)이다. 1127년 4월, 오늘날의 흑룡강성으로 끌려간 황제를 비롯해 황후, 종실, 외척 등 3천여 명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로써 송나라는 막을 내리고 휘종의 작은 아들인 조구(趙構)가 장강을 넘어 남경으로 탈출했다. 항주에서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남송(南宋)이고, 첫 번째 황제가 고종(高宗)이다. 이때부터 개봉(開封)을 수도로 했던 전(前)의 송나라를 북송(北宋)이라고 부른다. 주색보다 무서운 것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황제의 무능함인데 이것은 백성에 대해서 커다란 죄악이다. 역대 남송의 황제들은 문약에 빠져서 허약하고,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타협하는 것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애국충정의 열기를 토해내는 세력들은 밀리거나 모함받아 귀양을 가거나 사약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사회적 정서와 애국지사들의 피나는 절규를 시로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아온 명작들이다. 이청조(李淸照, 1084-1155)는 산동성 재남 출신의 시인인데 남편과 사별한 뒤에 강남에서의 어려운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다.

여름날의 절구(夏日絶句)
살아생전에는 세상에 호걸이 되고 /죽어서는 귀신의 영웅이 되고 싶네 /지금 항우를 생각하는 것은 /강동으로 건너가지 않았기 때문이네
生當作人傑(생당작인걸) /死亦爲鬼雄(사역위귀웅) /至今思項羽(지금사항우) /不肯過江東(부긍과강동)

시인은 항우가 유방군에게 쫓겨 오강에 이르렀으나 강을 건너 피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용기를 찬양하면서 적(금나라)에게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굴욕적 타협만을 시도하는 당시의 패기 없고 부패한 조정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서호와 역사인물들
서호 주위에는 충신, 열사들의 묘가 많은 데도 악왕묘 외에는 찾는 사람이 드물다. 명나라의 충신인 우겸(于謙, 1398-1457)은 간신배의 모함을 받아 기시형(棄市刑)에 처해졌으나 위급한 나라를 구한 공과 억울함이 밝혀져 다시 복권되고 벼슬이 내려졌다. 생사람을 죽이고나 서 명예회복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한 사람 추근(秋瑾, 1877-1907)은 중국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에 유학하였으며 혁명사상을 품고, 동맹회에 들어가 여권 신장에 노력했다. 오월(吳越)지방에서 혁명군을 지휘하며 거병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시대를 앞서간 사람으로 중국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악비(岳飛, 1103-1142)가 있다. 의용군으로 일어나 여러 차례 금나라 군대를 무찔러 용맹을 드날렸고, 빼앗긴 영토 회복에 뜻을 두었으나 주화파 진회(秦檜)의 모함으로 불과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살해되었다. 악왕묘(岳王廟)에 들어가면 악비 자신이 쓴 환아산하(還我山河)라는 힘찬 글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 "나의 산하를 돌려달라"는 구호가 악비를 죽게 했다면 우리나라도 평화통일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죽게 했는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악비의 만강홍(滿江紅)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삼십년 세운 공명은 먼지와 흙이요 /팔천리 달릴 장정은 구름과 달이라도 /한 눈 팔지 마라. 젊은 머리새면 /슬퍼한들 무엇하리 /정강의 치욕은 아직 못 씻었다 /산하의 원한은 언제 풀 수 있을까
三十功名塵如土(삼십공명진여토) /八千里路雲和月(팔천리로운화월) /莫等閒 白了少年頭(막등한 백료소년두) /空悲切(공비절) /靖康恥(정강치) /猶未雪(유미설) /臣子恨(신자한) /何時滅(하시멸)

시가 길어서 그 중 일부나마 악비의 충의에 젖은 구절만 소개했다. 또 지주(池州) 취미정(翠微亭)에서는 "산수 좋은 곳 다 보지 못했건만 말발굽은 밝은 달을 쫓아 돌아오기를 재촉한다(好水山 看看不足 馬蹄催月明歸, 호수산 간간부족 마제최진월명귀)."고 말한다. 망중유한을 즐기는 시간에도 위국충정을 벗어나지 못하는 악비의 무장다운 정신이 짙게 배어난다. 이런 사람마저 역적으로 몰려 죽는 남송이라면 망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것 아닌가!
악비가 무장으로서 나라를 지키려다 비명에 갔다면 문신으로서 남송을 위해 끝까지 버티다가 잡혀 원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귀순을 종용받았지만 끝끝내 지조를 지키다 처형당한 사람이 바로 문천상(文天祥, 1236-1283)이다. 황제는 이미 항복했는데 홀로 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군을 상대로 싸웠으니 그 의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그의 시 "금릉역(金陵驛, 포로가 되어 금릉역을 지나며)"를 보면 나라를 잃고 죽어서도 조국을 지키겠다는 애국지사의 처절한 심정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통함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잡초에 묻힌 행궁엔 석양이 비쳤는데 /정처 없는 외로운 구름은 어느 곳에 의탁할까 /산하의 풍경은 원래 달라진 것이 없건만 /성안의 인민들은 이미 절반은 죽고 없네 /땅을 뒤덮은 갈대꽃은 나를 따라 시드는데 /옛날 집에 제비는 뉘 곁에서 날까 /이제부터 이별하여 강남 길 떠나지만 /우는 두견새 되어 피 먹고 돌아오리라
草合離宮轉夕暉(초합이궁전석휘) /孤雲飄泊復何依(고운표박부하의) /山河風景原無異(산하풍경원무이) /城郭人民半已非(성곽인민반이비) /滿地蘆花和我老(만지노화화아노) 舊家燕子傍誰飛(구가연자방수비) /從今別却江南路(종금별각강남로) /化作啼鵑帶血歸(화작제견대혈귀)

항주와 서호는 우겸, 추근, 악비, 문천상 등 우국열사의 무덤과 피맺힌 시구가 살아있는 도시다. 역사 없는 도시로 그저 놀이와 여흥의 장소로만 생각할 수 없는 곳이란 말이다. 항주는 본래 인물이 많은 곳인데 그 분들의 생애와 사상에 천착하면 더욱 의미가 크게 느껴질 것이다.
서호에 물이 맑고 깨끗하다고 칭송한다. 유람선도 기름을 사용하지 않고, 축전지(蓄電池)로 운행한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매일 30만 톤의 전당강 물을 끌어들여 물갈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수면 위에서 백조가 평화롭게 떠도는 것은 물 밑에서 양발을 쉬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비교하고 싶다.
항주시에 있는 절강(浙江)대학교에서 중국인들을 가르치고 있는 한국인 박인성 경제학 교수가 말해준다. "서호를 내려다보이는 경관 좋은 아파트는 평당 가격이 한국 돈으로 오천만원이 넘는다"고. 개혁개방이 시작된 지 불과 20여년인데 이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부(富)가 한쪽으로만 몰린다면 양극화의 간격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 몹시 궁금하다. 중국식 사회주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좀더 깊이있고 체계적으로 공부해야만 한다.
항주와 서호에서 뇌봉탑(雷峰塔)과 백낭당(白娘娘)의 전설이나 경항운하(京杭運河), 남송관요박물관(南宋官窯博物館), 영은사(靈隱寺)와 비래봉(飛來峰), 악왕묘(岳王廟), 육화탑(六和塔)과 전당강, 서령인사(西印社) 등은 반드시 봐둬야 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