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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세상 벗어나 인생을 반추하던 곳

▲동리진(同里鎭)과 사가원림(私家園林)
문헌에 보면 동리에서는 퇴사원(退思園)을 먼저 꼽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국의 원림(園林)은 2천여 년의 역사가 있다. 북경 저 멀리 숭덕의 피서산장 우리나라에서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희(康熙)황제가 시작하여 그의 손자인 건륭(乾隆) 황제가 40여 년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끝에 일구어 낸 황가원림(皇家園林)이다. 북경 자금성의 어화원(御花園), 만수산(萬壽山) 기슭에 있는 이화원,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가 "우리의 모든 교회와 보물을 다 합쳐 놓아도 이 아름다운 건축물에는 비할 수가 없다"고 평한 원명원(圓明園), - 그러나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당시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그 아름다운 정원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방화할 줄이야. - 소주 근방에 있는 졸정원, 망사원(網師園), 이원(怡園) 등 팔대원림은 중국의 정서를 대표하는 사가원림(私家園林)이다.
광동지역의 영남원림은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빼어나다고 평한다. 나는 이러한 원림을 찾으면서 느낀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중국의 사가원림은 일반적으로 현실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소유했다. 그래서 사가원림에는 독립적인 인격을 추구하는 정신과 뒤늦게 자신의 인생을 반추해보는 삶에 대한 반성이 다분히 표현되고 있다. 원림은 그들의 여생을 편안히 쉴 수 있는 휴식처이면서 동시에 어지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본성을 되찾을 수 있는 유토피아였다. 따라서 사가원림은 전체적인 설계 구조부터 부분적인 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러한 의식을 담아 품격 있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예를 들면 도연명(陶淵明)의 귀원전거(歸園田居)와 같이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와 농원에서 밭갈이 하는 것을 비롯해서 도교사상을 담은 역대 화백들의 명화와 문인의 사상을 담은 추상적 이상향을 집약한 것이 사가원림의 특징이다.
퇴사(退思)란 춘추좌전(春秋左傳)에서 보이는 "進思盡忠 退思補過(진사진충 퇴사보과)"에서 인용한 것으로 "조정에 나아가서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물러나서는 자신의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보충할 것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보과(補過)란 당신(임금)으로부터 멀리 나와 소외되어 있으나 아직도 옛날에 다하지 못한 충성을 다 하겠으니 나를 불러달라는 간절한 의미가 담겼으리라. 퇴사원의 주인 임란생(任蘭生)은 동리 사람으로 안휘성(安徽省) 일대 광활한 지역에서 높은 벼슬을 줄이어 지낸 사람이다. 퇴사원이 1883년에 조성된 건물이니 임란생 역시 근대 인물이다. 퇴사원은 어느 원림에 비해도 손색이 없다. 댁내 한 가운데 건물은 밭에서 향내가 난다는 원향루라는 편액이 걸렸는데 이것이 집 주인의 아호라 한다.
안에는 퇴사초당(退思草堂)이라고 겸손한 액자가 걸려 있으나 당초무늬 탁자, 의자, 그림으로 장식한 화려한 이 공간은 벌써 초당이 아니다. 연못에는 황금붕어 떼가 사람을 따라 몰려오고 가산(假山) 위에는 면운정(眠雲亭)을 지어 구름 위에서 잠을 청한다. 퇴사원의 천교(天橋) 앞에 태호석으로 된 영벽석(靈璧石)은 모든 사악함을 물리친다고 한다. 구곡회랑(九曲回廊)에 있는 각기 다른 문양의 누창(漏窓)이 돋보인다. 그 창틀 한 가운데 석고(石鼓)에는 "淸風明月不須一錢買(청풍명월불수일전매)"라는 글이 있는데 아마도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달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했으리라. 이것은 청풍명월을 돈 한 푼 필요 없이 즐긴다는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 중에서 나오는 유명한 시구가 아닌가!
대체로 백성을 가렴주구(苛斂誅求)해서 치부한 관리들의 원림은 사치스럽고 광대하며 많은 기교가 들어있다. 그러나 자신이 땀 흘리며 노력해서 부를 쌓아온 부상(富商)들의 집엔 원림이 없다. 주장(周莊)의 심만산(沈萬山)의 저택도 방은 많이 있으나 일꾼들이나 사용하는 방이고, 대문은 배가 닿는 부두가 된다. 이토록 실용적이고 소박하다. 상해에 있는 호설암(胡雪巖, 1823-1885)의 옛집은 집 전체가 아름답고 정성이 들어 있지만 절제된 예술품이지 낭비하고 사치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소주의 가장 대표적 원림이자 광대한 졸정원은 왕헌신(王獻臣)이 높은 관리로서 돈을 모아 조성한 것이나 그 아들 대에 가서 노름빚으로 집을 날렸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인과응보가 가끔은 사실로 나타나는 모양이다.


동리 인근 '서왕원 작은 묘'에 큰 사람 잠들어

▲오자서(吳子胥)의 묘를 찾아서
사마천(司馬遷, B.C.145?-B.C.86?)의 '사기(史記)'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람이 오자서와 범려인데 두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은 매우 달랐다. 범려는 굴절은 있었으나 매우 슬기롭게 살아서 주군(主君)을 회복시키고도 홀연히 떠나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부와 영광을 보전하고 제 명에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자서는 자기 의지대로 살았기 때문에 조국 초나라를 탈출하여 사경을 넘나들고 풍상(風霜) 속에서도 오나라 공자 광(光)을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오나라 왕 합려(闔閭)가 아닌가! 합려와 의기투합하여 초나라를 정벌하고 아버지와 형의 원수에게 복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합려의 아들 부차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부차의 오만함과 간신배들의 모함에 의해 제 명을 다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자서의 일생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위해서 초지일관 달려 나가는 투지와 지략 그리고 의리에 대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죽음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의지를 불태우는 오자서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섬광 같은 그의 눈빛을 보는 듯하다.
동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자서의 묘가 있는 서왕원(胥王園)이 있다. 가는 비가 내리는 묘역은 조용하기만 하다. 원(園)에 들어서니 금빛으로 된 오자서의 형상이 묘도(墓道) 입구에 서 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자서의 생애를 아는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규모도 주위환경에 비해서 작을 뿐만 아니라 조잡하기까지 하다. 묘로 걸어 들어가는 길은 넓고 시원하고 쭉쭉 뻗어있다. 묘도 왼쪽 담 너머 저 편에는 아파트가 줄이어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오강(吳江)이 흐른다. 묘도가 끝날 쯤 해서 왼쪽으로 오자서 패방(牌坊)이 서 있는데, 그 안으로 초라한 묘가 있다. 주위 경관에 비해 묘의 규모가 작은데 이것도 이 근래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사당에 들어가니 썰렁한데 오자서의 좌상 위에는 '彪炳千秋(표병천추)'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이름이 천추만대에 빛난다"는 글귀만이 오자서를 위로하리라. 나오는 맞은 편 벽에도 '名垂竹帛(명수죽백)'이라고 음각하고 금칠을 했는데 "이름이 역사에 실려 후세에 길이 전해진다"는 것은 오자서를 기리는 따뜻한 마음과 정성이 보인다.
한국에서는 명수죽백이 아니라 '垂名竹帛(수명죽백)'이라고 보통 쓰는데 중국은 우리와 다르게 자순(字順)을 사용하나 보다. 나오는 길에 다시 한 번 오자서의 서 있는 형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 대(臺) 밑에 네모난 화강암에는 '상천법지 상토상수 건축대성(象天法地 相土嘗水 建築大成)'이라고 새겨져 있다. "하늘을 본받고 땅에서 배우니 대지를 다스리고 물길을 알아 토목공사에 대성하다." 오자서가 초나라에서 망명하여 여러 나라를 전전하면서도 사람을 새로이 얻는 것은 체험에서 오는 식견과 선천적인 탁월한 능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 정치력은 권력의 잔인함에 탄식하고 복수를 위해 세월을 기다리면서 차분하게 성공에 접근하는 것은 오자서의 전 생애 자체이기도 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오자서가 토목공사에 탁월했다는 것은 이곳에서 처음 읽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