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동양방직 공장 소설속 대동방직 모델
탯돌 등 원형보존·일본식 목조건물 제자리에
인천항을 매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항구에 잔잔히 잠겨 있는 바다는 거대한 호수 같다. 항구가 바다를 품었다면 항구 일대에 숲을 이룬 공장의 키 큰 굴뚝과 육중한 곡물창고는 항구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인천항에서 '오늘'의 모습 혹은 '내일'의 꿈 보다는 '어제'의 기억이 묻어나는 이유는 무얼까. 그 기억이란 붉게 녹슨 쇳조각의 표면을 손톱으로 긁을 때 느껴지는 질감과도 같다. 힘없이 부서지는 녹 가루와 목을 간질이는 녹 먼지의 기억들 말이다.

그것은 인천항이 개항과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는 질곡의 역사를 온전히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강경애가 1934년 8월 1일부터 12월 22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인간문제>는 이곳 인천항과 만석동에 위치했던 동양방직을 주요 무대로 하고 있다. 리얼리즘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은 일제 식민지 시절의 인천항과 인천의 모습을 빛바랜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펼쳐놓는다. <인간문제>에서 그려진 인천항은 부산항과 광양항에 비해 초라해진 지금과는 달리 웅장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의 심장지대인 인천의 이 축항은 전 조선에서 첫손가락에 꼽힐 만큼 그 규모가 크고 또 볼 만한 것이었다. 축항에는 몇천 톤이나 되어 보이는 큰 기선이 뱃전을 부두에 가로 대고 열을 지어 들어서 있었다."(강경애 <인간문제> 창비, 254쪽)

그런데 강경애가 전달하고 있는 인천의 모습은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인간문제>에서 인천은 억압과 착취를 받는 노동자계급의,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노동과 구체적인 현실이 집약된 곳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 출신인 '신철'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려진 노동현장은 지옥과도 같다.

공장 한켠에 쌓여있는 면화
"아침 여섯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일을 마친 신철이는 전신에 맥이라고는 다 끊어진 듯하였다. …짐에서 떨어지는 먼지며 바람결에 불려오는 먼지가 수천 명의 노동자의 몸부림치는 바람에 가라앉지를 못하고 공중에 뿌옇게 떠돌았다. 그리고 사람을 달달 볶아 죽이고야 말려는 듯한 지독한 볕은 신철의 피부를 벗기는 듯하였다."(같은 책 248, 257쪽)

그러나 부두노동자로 살아가는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 '첫째'에게는 인천항은 계급적 각성을 하게 되는 노동 현장이며, '첫째'는 식민지 조선의 심장부인 인천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힘차게 돌릴 혁명적 주체로 성장하게 된다.

<인간문제>의 여주인공은 '선비'다. 그녀는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지주인 덕호의 성적착취에 시달리다가 인천으로 도망쳐와 대동방직에 취직한다. 소설 속의 대동방직은 당시 일제의 자본이 운영하고 있는 동양방직이다. 해방 후 동양방직은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선구자인 서정익(1910∼1973)이 인수해 동일방직으로 재탄생하게 되고 동일방직은 이후 우리나라 섬유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손꼽히게 된다.

소설에서 대동방직으로 칭해진 동양방직은 이름과 주인이 바뀌었을 뿐 그 공장 터가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1930년대 당시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사무동을 지나 공장으로 진입하는 통로에는 원사가 비에 젖지 않게 지붕을 올린 목조 구조물이 길게 이어져 있다. 동행한 향토사 연구가 이종복 시인은 "당시의 목조 구조물에 약간의 구조 변경을 했지만 탯돌 등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인 관리감독자들의 사택으로 쓰였을 일본식 목조건물과 기와집, 용도를 알 수 없는 화강암 초석들도 눈에 띤다. 건물 벽에서도 당시 일본식 벽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소설에서 여주인공 '선비'가 조직 상층부의 지령에 따라 공장을 탈출하는 '간난이'를 도와 밖으로 내보냈던 공장 담장은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동양방직의 정문 돌기둥이 자리를 지키며 서있다.

소설의 무대가 됐던 현장을 밟으며 걷는 동안 주인공 '첫째'의 입을 빌린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새롭게 떠오른다.

"인간문제!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를 위하여 몇천만 년을 두고 싸워왔다. 그러나 아직 이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앞으로 이 당면한 큰 문제를 풀어나갈 인간이 누굴까?"

작가는 인간이 직면한 모든 삶의 문제를 노동계급이 해결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어느 누구도 쉽게 확답을 못 내릴 듯하다.

소설이 쓰였을 당시의 손수레가 눈에 잡혔다. 식민지 조선과 그 후대의 노동자들의 손때와 땀이 짙게 배어있는 손잡이를 감싸 쥐고 밀어보았다. 뜻밖에도 잘 굴러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인간의 역사 앞에서 초라해짐을 느꼈다.
 
 
공장 통로
소설<인간문제는> - 민중들이 겪은 사회문제 사실적 묘사

 
가난한 소작농인 '첫째'는 지주인 덕호에 대항했다가 붙일 땅마저 잃고 인천으로 흘러들어 부두노동자로 살아간다. 그는 노동을 통해 정신적인 각성을 하게 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소작농의 딸인 '선비'는 덕호에게 농락당한다. 선비'는 '첫째'가 삶을 찾아 인천으로 떠났듯이 덕호의 마수에서 벗어나 인천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동방직에 노동자로 취업을 하게 되고 고향 친구인 '간난이'와 함께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선비'를 사모하던 지식인 출신의 '신철'도 가출을 해 인천에서 부두노동자로 일하며 '첫째'와 함께 부두노동자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선비'는 힘든 공장일과 열악한 작업 조건 속에서 폐병에 걸리고 결국 목숨을 잃는다. 부두노동자 시위를 주도했던 '신철'은 일제 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나중에 전향을 한다. 한편 '첫째'는 '선비'의 주검 앞에서 계급적 각성을 하게 되고 노동계급이 계급혁명의 진정한 주체임을 깨닫게 된다.

강경애의 <인간문제>는 이기영의 <고향>과 함께 1930년대 프로문학의 시대를 대표하는 장편소설로 꼽히며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소설은 조선의 농촌문제, 여성문제, 계급문제, 노동문제 등 당시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이 직면한 사회문제들을 유기적으로 다루고 있다.
 
/글·사진=조혁신기자 blog.itimes.co.kr/mr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