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음식점 본토 자리가 작가 집터 … 중국인 상점 몇개 안남아
 
 
#1 겨울, 중국인 거리

"시를 남북으로 나누며 달리는 철도는 항만의 끝에 이르러서야 잘려졌다. 석탄을 싣고 온 화차는 자칫 바다에 빠뜨릴 듯한 머리를 위태롭게 사리며 깜짝 놀라 멎고 그 서슬에 밑구멍으로 주르르 석탄 가루를 흘려 보냈다." - 오정희 '중국인 거리' 중에서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 일제강점기 시절 본정통이었던 길을 따라 공자상이 있는 곳까지 나는 걸었다. 북풍에 실려온 항구의 짜디짠 겨울바람이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발길을 재촉하건만 계단 앞에 멈춰 섰다. 계단은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길이다. 개항기 시절 이 계단을 좌우로 왼쪽엔 일본조계지였고 오른쪽엔 청국조계지였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지금도 당시의 흔적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소설가 오정희는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이곳 중국인 거리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몇 해 지나지 않은 50년대 중후반 무렵이었다. 어린 꼬마소녀 오정희 눈에 인천과 이곳 중국인 거리는 암울함과 활력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비춰진다.

오정희의 부친은 동양석유주식회사 인천대리점 지점장으로 이곳에 오게 된다. 가장을 따라 서울 변두리에서 바리바리 이삿짐을 챙겨 이곳 중국인 거리에 둥지를 튼 그녀와 가족들은 이해 못할 풍경들을 목격한다.

허벅지까지 맨살을 드러낸 채 군복 윗도리만을 걸친 양공주들, 아편에 취해 있는 중국 노인들, 흑인 병사들… 이 거리의 첫인상은 오정희의 기억에 또렷이 각인됐고 훗날 소설 '중국인 거리'의 배경이 된다.
 


#2 양갈보 혹은 양공주

"난 커서 양갈보가 될 테야."

소설 '중국인 거리'의 주인공 '나'의 친구 치옥의 언니 매기는 '양갈보'라 손가락질 받는 미군에게 몸을 파는 여자였다. 치옥도 어른들이 양갈보를 업신여기는 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 아홉 살 소녀 치옥에게 양갈보가 되려는 생각을 품게 했을까? 해답을 잠시 유보하며 현재의 중구청 앞길로 발걸음을 돌린다.

일제가 물러난 후 이곳 일본조계지 거리의 적산가옥들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빠르게 양갈보촌으로 변했다고 한다. 바로 이 거리의 코앞 항구를 중심으로 미군과 유엔군이 주둔했기 때문이다.

오정희는 "이 거리의 적산 가옥들 중 양갈보에게 방을 세 주지 않은 것은 우리집뿐이었다. 그네들은 거리로 면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거리낌없이 미군에게 허리를 안겼으며 볕 잘드는 베란다에 레이스가 달린 여러 가지 빛깔의 속옷들과 때 묻은 담요를 널어 지난밤의 분방한 습기를 말렸다."고 당시 풍경을 묘사한다.

기자와 동행한 이종복 시인은 "지금의 '서도회관' 건물 자리는 미군 하사관 숙소가 있었고 중부경찰서 자리 오른쪽 구석에는 미군 PX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양갈보촌은 70년대 미군부대가 철수하면서 모두 없어졌다. 미군을 따라간 그녀들의 빈자리에는 다방, 술집, 부두노동자 숙소 등으로 변모했고 세월의 부침을 겪으며 그런 기억조차도 지워졌다. 현 중구청 앞 테이크아웃 커피점에서 원두커피를 사 마시며 양갈보가 되려했던 소녀를 생각해 보았다.

가난한 시절의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양갈보의 삶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환상의 세계였을 것이다. 비스켓 상자와, 화장대, 향수병, 패티코우트, 속눈썹, 진주 목걸이, 브로우치, 귀걸이, 투명한 거울…. 소녀 치옥은 친구 '나'에게 매기언니의 물건들을 보여주며 다짐하듯 되뇌였다. "나는 양갈보가 될 거야"라고….
 


#3 다시 중국인 거리에서

소설가 오정희가 살았던 집터는 지금의 중국 음식점 '본토' 자리다. 오정희가 이사를 왔을 땐 단층짜리 적산 가옥이었고 동양석유주식회사 인천지점 자리였다. 불과 3년전까지만 해도 '본토' 자리 건물에는 동양석유 간판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오정희는 신흥초등학교를 다녔다. 오정희가 통학했던 그 길은 양공주촌이었다. 비계가 붙은 흑인 병사의 품에 안긴 여자들과 혼혈아들, 욕지거리가 가난과 인생의 비극과 함께 난무했던 거리다.

당시만해도 중국인들의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신포동 일대 상점의 삼분의 일을 중국인들이 차지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지금은 중국인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지금 남아 있는 상점들은 '강호정육점', '의흥덕 양화점' 등 몇 개뿐이다. 화교학교 교정에서 펄럭이는 '청천백일기'만이 이 거리가 중국인 거리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대한통운 창고 자리는 당시 석탄 창고가 있었다. 오정희가 소녀시절 한움큼의 밀알을 훔쳐 먹었던 제분공장은 여전하며 석탄 화차들과 철로와 항구도 그대로다.

하지만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 이후 인천의 중국인 거리는 문학적으로 재조명되지 않았다. 그 가난했고 치욕스러웠던 과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데도 말이다.

/글·사진=조혁신기자 blog.itimes.co.kr/mr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