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도
대청도는 이름 그대로 '푸른 섬'이다. 후삼국 시대, 대청도의 이름은 '푸른 섬'의 한자표기인 포을도(包乙島)로 불렸으며 고려 인종 때 대청·소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대부분의 주민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일부는 농·어업을 겸하고 있다. 대청도의 어업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왔다. 일제 때는 고래잡이, 50~60대는 조기·까나리잡이, 70~80년대는 홍어잡이가 많았다. 90년대부터는 우럭과 쥐노래미 활어가 주력 어종이 됐으나 WTO체제 하에서 가격경쟁력을 상실, 양식사업과 어장복원 등의 현안을 안고 있다.

대청도는 곳곳에 갯바위 낚시터가 형성돼 있어 1년 내내 낚시꾼들의 애용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211km 떨어진 대청도는 바다도 푸르고 섬도 푸르다. 나무가 많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사탄동', '지두리' '농여' '답동' 등 아름다운 해변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아울러 이작도에 있는 신비의 모래섬 '풀치'와 같은 모래섬도 만날 수 있다. 대청도에선 이 모래섬을 '풀턱'이라고 부른다.

풀턱은 농여해변에서 만날 수 있다. 맑고 짙푸른 해안가인 농여해변의 풀치는 간조 때 드러난다.

답동해변은 길이 1km, 폭 150m의 백사장을 가지고 있다. 무수한 노송이 병풍처럼 해변을 감싸고 있으며 백사장 후면으로는 잔디밭과 종합운동장이 있어 가족휴양지로 지내기에 최적의 장소다.

사탄동해변은 우거진 해송의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길이 1km 정도의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진, 대청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알려졌다.

옥죽동해변은 해수욕장이라기 보다는 모래사막으로 더 유명하다. 모래사막은 해변의 모래로 바람에 날려 물결처럼 섬 안쪽으로 이동한다. 해안사구가 잘 발달하고 생태계가 잘 보존돼 있어 매우 특이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관광객들이 보기엔 신비한 장관이지만 대청도 주민들은 모래가 집안으로 날아들어 불편을 겪고 있기도 하다.

지두리해변은 동서로 가로지른 산줄기로 바다가 잔잔하다. 여름철 계절풍인 태풍, 남풍, 남서풍, 남동풍 등을 산줄기가 막고 있는 것. 1km에 이르는 길이와 폭 300여m의 해변으로 이뤄졌으며 수심이 완만해 어린이들이 물놀이를 하기에 적합하다.

원나라 태자의 유배지였기도 한 대청도. 이 푸른 섬은 지금, 짙푸른 바다 물결과 푸른 나무들로 눈을 시리게 만든다.


▲ 찾아가는 길
인천항 여객터미널에서 오전7시10분·8시, 오후1시 하루 세 차례 쾌속선이 출발한다. 차로 일주할 경우 선진포선착장-답동해변-모래사막-옥죽포해안가-농여해변-동백나무북한자생지-자두리해안가-사탄동해변-서풍받이-독바위-선진동으로 돌면 된다. 대청도에선 공용버스가 하루 네 차례 운영된다. 대청도 버스노선은 동내도-사탄동-고주동-선진동-학교-옥죽동 등 동내동에서 시작해서 귀환하는 것으로 끝난다. 소청도는 답동선착장-예동-분바위-등대-노화동해변을 거쳐 다시 답동선착장으로 귀환한다. 종합문의 889-6667, 836-6662(백령여행사) /글·사진=김진국기자(블로그)freebird

1 적의 어선이 접안할 수 없도록 하기위한 날카로운 쇠기둥 '용치'는 분단조국의 슬픈 산물이다.
2 대청도 포구의 방파제 앞으로 보이는 바다가 청정하기만 하다.
3 대청도에는 사탄동, 지두리, 농여, 답동 등 아름다운 해변이 섬을 빙 둘러싸고 있다.


"물범과 친구하러 오세요"
인터뷰 - 정형택 대청면장

"서해5도는 다 비슷하지만 저희 대청도가 다른 점이 있다면 모래가 많다는 것입니다."

정형택(56) 대청면장은 "대청도에는 비사 성분인 모래가 너무 많아 섬 안에 쌓인다"며 "이로 인해 대청도는 농경지가 매몰돼 사방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래는 많은데 사실 쓸 수 없는 모래입니다. 입자가 너무 고와 건설용으로 쓰지도 못한다고 하더라구요."
정 면장은 "과거엔 모래 때문에 문을 못 열을 정도"였다며 "관광객들에겐 진기한 장면이지만 대청주민들은 사실 불편하다"고 웃음짓는다.

"옥죽포항의 경우 모래가 자꾸 밀려와서 수심이 얕아지고 있습니다. 접안하고 출어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지요."

그는 "그러나 대청도에선 물범도 많이 볼 수 있다"고 자랑한다.

"저희 섬에 물범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백령하고 그리 멀지 않은 이유도 있지요."

그는 소청도에 대한 자랑도 덧붙인다.

"소청도의 분바위는 대리석이 띠모양으로 1km 정도 형성돼 있어요. 무려 8억5천만년 전의 돌이죠."
대청도에선 일제 때 고래잡이가 이뤄지기도 했다.

"대청도에서 잡았던 고래만도 1년에 당시 돈으로 30만원 정도 됐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300억에서 500억원에 이르는 돈이었죠."

대청도 토박이로 군청에서 15년 간 근무했다는 정 면장의 말에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김진국기자(블로그)free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