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섬이 아니라 광야였다
작지만 큰 섬. 섬이지만 광야인 곳. 옛부터 '교동도'는 우리 나라 해상의 중심지였다. 우리 나라와 중국을 잇고 산간과 서해를 잇는 중요한 교통요충지였던 것이다. 교동도는 또 섬 모양이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와도 같다. 그래서인지 섬은 아늑하며 평화롭기만 하다.

섬의 중앙부는 넓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강화도 전체에서 나오는 쌀의 반을 생산하고 있을 정도이다. 교동도는 연산군의 유배지로도 유명하다. 1506년 중중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1494~1506)은 그 해 11월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교동도의 명물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향교인 '교동향교', 고려 때 창건한 사찰 '화개사', '교동읍성' 등이다. 이와 함께 '연백망향대', '달우물 온천', '읍내리 비석군'도 볼거리다. '대룡시장'은 옛날 60~70년 대 시장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5년(1127) 화개산 북쪽인 고구리 향교골에 처음 세워졌다. 이후 교동읍이 읍내리로 옮겨지면서 부사 조호신이 영조17년(1741)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현존하는 우리 나라 243개 향교 가운데 가장 오래된 향교다. 충렬왕12년(1281) 문성공 안유가 그의 제자 김문정을 시켜 원나라에 가서 공자상과 그 제자의 상을 모셔오는 길에 교동에 들려 문묘초막을 짓고 봉안한 것이 우리 나라 문묘의 시초다. 그 후 전국에 향교가 세워졌다.
'화개사'는 고려 때 창건한 사찰이다. 동국여지승람은 고려말의 문신인 목은 이색(1328~1936)이 화개사에서 독서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곳엔 처음 도금불상 2개가 있었으나 지금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고 전한다. 본래 건물은 1840년쯤 화재로 소실됐다. 이후 다시 건립했으나 1967년 다시 불이나 1968년 중건했다. 유물로는 절 뒤에 '문무정'과 절 오른쪽 '불두화'가 있다.
'교동읍성'은 처음 둘레가 305m, 높이가 2.4m로 축조됐으나 모두 소실되고 지금은 남문만 남은 상태다.
'연백망향대'는 설날과 추석에 합동차례를 지내는 곳이다. '연백'은 연백과 백천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남북분단 이전, 교동도와 연백은 같은 생활권이었으며 그만큼 왕래도 잦았다.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들이 연백이 잘 보이는 곳에서 차례를 지내는 데서 유래했다.
교동향교 근처에 있는 '달우물온천'은 1989년 7대째 사는 주민에 의해 발견됐다. '기적의 생명수'라는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하고 있다.


♣ 찾아가는 길
김포에서 48번 국도를 타고 강화읍을 지나 신봉리 301번지방도에서 좌회전해 계속가면 외포리와 창후리 선착장의 갈림길이 나온다. 석모도를 가려면 외포리를 이용해야 하지만 교동을 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을 이용해야 한다. 48번 국도는 본래 김포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강화읍을 거쳐 인진나루로 연결, 연백과 개성으로 연결되는 도로다. 하지만 분단의 벽으로 인진나루로 가기 전 신봉리에서 창후리로 꺽어야 한다. 창후리 화개해운 터미널에서 오전 7시30분~오후7시(겨울철은 오후5시)까지 배가 오간다. 종합문의 032-932-5001~3 /글·사진=김진국기자(블로그)freebird


"교동도는 우리 나라와 중국을 잇은 교통로 였어. 역사가 깊은 곳이지. 교동향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문묘를 올린 곳이라우."
한기정(70) 교동향교 전교는 "1281년 문성공 안유가 향교에 문묘초막을 짓고 봉안한 것이 문묘의 시초"라며 "현존하는 우리 나라 200여 개 향교 중 가장 오래된 곳"이라고 말한다.
"교동도를 한번 쭉 돌아보시우. 화개산을 중심으로 산이 빙 둘러쳐져 있고 섬 중앙부는 넓디 넓은 교동평야가 펼쳐져 있어요. 이런 산세와 지세를 가진 섬이 또 어딨을라구."
한 전교는 "남쪽에서 화개산을 바라보면 허물을 막아주는 큰 뚜껑이 덮여 있는 것 같고, 서쪽에서 바라보면 교동평야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쌓아뒀다가 양식으로 제공하는 노적봉과도 같은 형상"이라고 자랑한다.
"상고시대의 교동은 화개산, 수정산, 율두산을 중심으로 3개였는데 오랜동안의 갯벌 충적으로 한 개의 섬이 됐다고 합디다. 또 한강, 임진강, 예성강에서 흐르는 물을 따라 충적된 갯벌이 쌓이고 쌓인 충적토로 교동평야가 이루어진거요. 역사적으로는 고려 때 비로소 축동이 완공돼 완전한 농경지를 만들었지."
교동도에 전기가 들어온 시기는 1972년이다. 이 때부터 영농기술이 크게 발달했고 육지에서도 보기드문 곡창지대가 되었다.
"돌아봤으면 알겠지만, 문화재도 많고 볼거리가 얼마나 많으우, 우리 섬에 자주 들어오소." /김진국기자(블로그)free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