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수기자의 중동·지중해 탐방기 - 3)그리스-(하)
아직도 발굴중인 고린도 폐허
그리스 북부의 고린도는 코린트(Corinth)라고도 불리우는 그리스 남북육상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이오니아해(海)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 곳은 기원 전부터 상업과 무역이 크게 번성한 곳으로 한때 세계 최대의 무역항구가 발달되었었다고 한다.

고대도시 유적 대부분 흙속에 파묻혀
고린도는 우선 사도 바울과 신약성서의 '고린도 전·후서'로 유명하다. 고대 그리스 시절 고린도 지역의 가장 높은 곳인 '고린도 언덕'은 여느 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미(美)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이 모셔져 있어 약 1천여명의 여사제들이 거주하며 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다. 그러나 이곳의 여사제들은 차츰 타락해 '거룩한 매춘부'로 불리우는 등 매우 도덕적으로 황폐해져 갔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예수 사후에 전도 여행을 떠나 기독교를 널리 알렸던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 교회를 세웠지만, 오히려 현지 종교와 어울려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자 경고 조로 써 보낸 것이 바로 신약성서 상 '고린도 전·후서'다. 당시 바울이 세웠다는 교회는 남아 있지 않지만, 한국 기독교인들의 '성지 순례' 코스에 반드시 포함된다. 따라서 고린도는 언제라도 성지 순례에 나선 한 무리의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고린도는 또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종말과 로마 제국의 시대를 열었던 '고린도 언덕 전투'로 유명하다. 고린도는 아테네에 밀려 쇠락의 길에 접어 들었다가 BC 146년 고린도 언덕 전투에서 패해 로마에 점령당했다.
고린도 언덕 전투는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그리스 로마가 벌인 마지막 전투로, 무사히 수비하던 그리스는 로마 장교와 내통한 한 여사제의 배신으로 패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고린도 운하 쪽빛바다와 어울려 장관

이후 고린도는 로마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가 BC 44년에 재건됐고, 512년 지진으로 쇠퇴한 후 1858년에 다시 지진으로 파괴되는 등 쇠락을 거듭했다. 따라서 고대 도시의 유적은 대부분 흙 속에 뭍혀져 있고, 현재 일부분에 대해서만 유적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고린도 언덕 밑 박물관에서는 헬레니즘 문화의 '도리아-이오니아-코린트' 등 시대별 기둥 양식 변천사를 한꺼번에 볼 수 있으며, 헬레니즘 시대의 찬란한 여러 다른 문화재들도 감상할 수 있다.
고린도 지역을 방문한 이들에겐 또 고린도 운하를 빼놓을 수 없다. 고린도 운하는 기원전 7세기 고린도 왕에 의해 처음 시도됐다가 좌절된 후 기원전 44년 시저, AD 67년 네로 황제 등에 의해 공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동원된 노예만 5천명이상 숨지는 등 계속 완공하지 못하다가 1893년 프랑스 기술진에 의해서 개통됐다.
이 운하는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연결하는 곳으로 운하가 없으면 300여km를 돌아가야 하는 해상 교통의 요지다. 현대식 중장비가 동원되지 않은 채 거의 사람 손으로 판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 운하는 쪽빛 에게해의 바닷물과 어울려 절경을 자랑한다. 고린도 운하의 양쪽 하구에는 멋진 해변 레스토랑들이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리스 전통의 돼지고기 스테이크와 '무사까'(으깬 감자 요리), 포도주, 올리브 등을 맛 보면서 운하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김봉수기자 (블로그)insman

▶고린도 옛터에서 발굴된 남자상. 인체를 선세하게 묘사한 헬레니즘식 특성이 두드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