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칼럼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슬픔을 함께 나누거나 위로해야 할 일에는 적극적이지만, 축하할 일에는 매우 인색하다는 어느 월간지에 실린 글을 읽고는 가슴이 뜨끔했다. 사람이 살다보면 축하할 일과 슬픔을 함께 나눌 일들이 종종 찾아온다.
그중에서도 축하할 일에 망설여짐은 겸손함이 지나쳐서일까? 오만함 때문일까? 아니면 잘못된 우월감의 표상일까? 상을 당한 집이나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흔쾌히 찾아가 아낌없이 위로를 하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병문안이나 문상을 정성스레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축하할 사람에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선뜻 나서기를 주저한다. 나 또한 후자에 속한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 숨겨둘 곳이 없다.
지난 해 농협에 근무 하는 고향 친구인 A씨가 조합원들의 투표를 거쳐 어렵게 임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친구는 당연히 그런 자리에 앉을만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곧바로 축하의 전화라도 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소모적 망설임 때문에 여러 날을 보낸 후에야 전화로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그런데 친구는 축하 몇 마디에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후 이른 아침 카메라 가방을 메고 들판을 거닐며 어린 시절 A친구와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떠올렸다.
A친구네는 농사일과 함께 가까운 바다에서 각종 어물과 조개를 잡아 살아가기 때문에 궁핍한 생활은 면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키가 워낙 큰 탓에 장대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지만 마음만은 장대보다 더 크고 인정이 많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썰매를 타고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마침 친구의 부모님은 조개를 잡으러 갯벌로 나가시고 동생들만 화롯가에 둘러앉아 있었다.
친구는 이불로 덮어둔 놋쇠그릇에 담아둔 밥을 꺼내서 주섬주섬 상을 차렸다. 상 위엔 말린 생선을 구운 것이며, 맛을 까서 무친 먹음직스러운 반찬들이 놓여있었다. 당연히 밥은 한 그릇이었다. 친구는 망설임없이 밥의 절반을 내게 권했다. 친구의 덩치로 보아서 절반을 주고나면 그 양이 턱없이 부족함은 당연했다. 나는 체면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허구한 날 멀건 김치죽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기에 친구가 나눠 준 잡곡이 약간 섞인 하얀 쌀밥은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갔다. 단숨에 반그릇을 먹어치우고는 무안해서 천정만 바라보았다.
친구는 부엌에 나가서 무엇을 한참 찾더니 시루떡 한 조각을 들고 와서는 동생들이 보지 않는 곳으로 오라고 하더니 책보자기에 황급히 넣어주었다. 밖에는 눈이 펑펑 쏟아졌다. 시루떡 한 조각이 눈에 젖을까봐 책가방을 품에 안고 집을 향해 뛰어가면서 신명나게 휘파람을 불었다. 다음날 친구와 나는 함께 변소청소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전과는 달리 힘이 없어 보였다. 과묵한 친구였지만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네게 준 그 떡은 성당에 가져갈 떡으로 어머니가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것"이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이미 떡을 먹어치웠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어릴 때부터 선한 일을 생활처럼 하면서 살아왔기에 그 추억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나는 평생토록 그때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친구는 어른이 되어서도 성실함과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은 직장이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향의 넘쳐났던 인정은 현대문명에 모두 빼앗기고 부모형제들 간에 재산문제로 원수가 되는 살벌한 세상 속에서 친구는 동생들에게 후한 나눔을 베풀었다.
그리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세상 떠나시는 그날까지 한 마디 불평 없이 깊은 효심으로 일관했던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뿌듯하다. 매년 늦가을이 되면 손수 농사지은 쌀 한 자루를 직접 들러 메고 와서는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은 채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축하할 일에 망설였던 못난 자신을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지만, 친구 덕에 깨우침을 받았으니 눈물겹도록 감사할 뿐이다. /최병관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