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석용 인천환경운동연합 부의장, 경제학박사
“플루오르 - 불소라고도 함… 할로겐 원소 중 가장 반응성이 큰 원소… 공기보다 약간 무거운 연녹황색 기체로 자극적인 냄새가 난다… 아주 낮은 농도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흡입하면 위험하다… 가장 강력한 산화제로… 원소 기체는 로켓 연료에서 산화제로 쓰이며… 공업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플루오르 화합물의 하나인 플루오르화수소 기체의 수용액을 플루오르화수소산이라 하는데 금속의 세척제와 유리의 연마제, 거품제, 부식재로 쓰인다…”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거의 모든 백과사전들이 싣고 있는 불소에 관한 해설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의 말미에는 “플루오르가 부족한 물에 소량 첨가해 충치를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을 소개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이러한 지식만으로도, 내가, 나와 내 가족의 충치 예방을 위해 불소를 물에 타서 마시고 싶은 생각을 추호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더욱이 나와 내 가족은 구강 보건 교육을 충실히 따른 탓인지 모르겠으나 충치로 고생을 하는 사람도 없다. 이런 경우에 내가 가족들에게 그런 실험을 한 번 해 보자고 권고한다면, 그들은 아무래도 나를 믿고 따를만한 아버지, 남편으로 보아줄 것 같지가 않다. 아무리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그러한 실험에 동참하여 주는 것이 가치가 있는 공중 사회의 미덕이라고 강변할지라도 정상적으로 동의를 얻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들만 하라고 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되물어 올 것이 분명한 일이고 그것이 상식이라고 생각되어서이다.
민주사회는 공적 권력과 개인 간의 관계를 헌법과 법률로 규정한다. 그것이 합의된 상식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우리의 헌법은 앞에서와 같은 나의 상식을 지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 헌법에 정해진 국민의 의무는 교육, 근로, 국방, 조세의 네 가지일 뿐이다. 불소 수돗물을 군소리 없이 마셔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아무리 여러 조문들을 폭 넓게 해석해 보아도 찾을 수가 없으니 하는 말이다. 그러니, 다수결이든 공권력이든 어떤 경우에도, (죄지은 것 없는) 나의 생명에 위해가 예상되는 일을 나에게 강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위해에 관한 평가는 나의 건강한 신념과 상식에 의할 뿐이라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조항과 양심의 자유에 관한 규정, 환경권의 정한 바에 따라 명백하게 내게 보장된 권리라는 것에, 누가 이의를 달 수 있을 것인가?
전기나 수도, 가스, 교육 따위 공공재를 소비하다 보면 그것의 공급 독점성으로 인하여, 자칫 공급자가 공급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공공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1) 헌법에 정한 국민의 인간적인 행복을 보장하기 위하여 2) 이윤을 최대가치로 하는 시장의 기능에만 맡길 수 없는 재화 또는 용역을 3) 국가, 지방자치단체 또는 그에 준하는 법률적 지위가 부여된 사업자가 공급하는 것이라는 원칙이 잊혀져서는 안될 것이다. 요컨대, 공공재의 공급은 공권력이 제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의 결과물이 아니며, 국민의 헌법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 등이 성실히 수행하여야 하는 의무의 이행 과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공재의 공급과 관련하여, 그들이 하여야 할 일은 합리적 상식에 충실하는 것 뿐, 서툰 신념과 불확실한 정보로, 국민의 행복을 시험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입장에서 수돗물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공공재로서의 품질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오염된 원수를 최대한 정수하여 누구나가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청정수의 상태이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에 부합하는 것일 것이다.
만일 거기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특별한 첨가나 가공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필요를 가지고 있는 특정인들에게 공급되는 시장 상품이 되어야 한다. 또한 특별한 상품은 당연하게도 구별된 공급 체계를 통하여 특별한 시장에서 거래되어야 할 것이다. 충치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건강을 위하여 비만 치료제와 각종 비타민까지 첨가한 종합 약물을 일반 수도관으로 공급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시민들의 충치가 걱정이 된다면, 원하는 이들에게만 보건소에서 불소 도포 시술을 염가에 제공하든지 구강 보건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공권력은 본래 공의무의 다른 말이며, 공의무는 국민을 아주 조심스럽게 모시는 것이라는 상식이 제자리에 섰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