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오아시스의 어머니 `시르디리아'-(2)고선지 장군의 석국정벌
 서기 750년.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군인 고선지(高仙芝) 부대는 당시 석국(石國)인 지금의 타쉬켄트를 점령한다.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이미 세 번의 원정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을 호령한 바 있는 고선지 장군의 위력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손쉽게 석국의 왕 투둔(Toudoun)의 항복을 받은 고선지 장군은 엄하게 왕을 꾸짖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또다시 신하의 예를 게을리 하는가?”
 “장군, 우리는 진심으로 예를 다하려 했지만 주변 나라들이 우리의 정성을 위협하였나이다. 통촉하시옵소서.”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지난해도 그대는 내게 똑같은 말을 했소.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던가. 3번째 맹세가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했거늘 또 그런 어설픈 충성맹세로 나를 놀리려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소.”
 “장군 믿어주십시오. 돌기시(突騎施·투르키스 투르크족)가 압바스의 힘을 믿고 우리와 주변 국가를 조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지금도 안서절도사인 나를 실망시키고 있소. 우리의 신하인양 충성을 맹세하지만 실은 그들을 이용하여 반란을 모색하고 압바스와 내통하고 있다는 걸 내 모를 줄 아는가?”
 당나라의 식민지 지배정책은 고삐를 느슨히 하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기미정책’이었다. 안서절도사인 고선지 장군도 이를 잘 활용하였으나 끝내 신하로서 조공의 의무를 포기한 석국의 왕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이는 용서의 문제를 떠나 고선지가 총괄하는 당의 서역경영에 도전한 것이나 다름없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특히,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을 틈타 신흥제국으로 떠오르는 압바스 왕조의 움직임을 알아내 대처하는 것이 서역경영과 확장을 책임지고 있는 고선지 장군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부화뇌동하는 속국들의 행동은 무엇보다도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석국 정벌은 이러한 급변하는 정세에서 고선지 장군의 서역경영에 대한 확고부동의 의지를 천명함과 동시 ‘일벌백계’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타쉬켄트역은 오가는 사람들로 활기차다. 얼굴만 봐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민족들이 오늘도 타쉬켄트 거리를 메우고 있다. 돈, 사랑, 명예 그리고 건강 등 각자 그들만의 길을 찾아간다. 역사도 그렇게 뒤따라간다.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더라도 묵묵히 발걸음을 뒤쫓는다. 그것이 이별이 되고 설령 무용지물이 될지라도.
 역 건너편 모바르나흐 거리의 후미진 골목을 들어가니 옹기종이 모여 있는 집들 사이로 조그만 언덕이 나타난다. 이곳이 고선지 장군이 점령했던 석국의 수도 민우르크 성터다. 성은 흔적조차 없고 잡초만 무성한데 목동들이 불로 그슬려 놓아 더욱 스산하기만 하다. 부서져 내린 성터 사이로 징벌 당시 불탄 층만 켜켜이 쌓여있다. 역사도 그렇게 묻혀있다. 회색의 지층을 손으로 파내자 뼈와 토기조각이 손끝에 와 닿는다. 순간 1,250여 년 전 고선지 부대의 말발굽에 짓밟힌 아비규환의 역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인간의 역사는 곧 강자의 법칙만이 통용되는 전쟁의 역사였다. 이는 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절대적 진리다. 따지고 보면 문명의 발전도 강자로 군림하기 위한 욕망표출에 다름 아니며, 이를 통해 삶의 윤택과 번영을 구가해 왔다는 논리는 한갓 포장에 불과한 것이다. 전 시대에 비해 보다 진일보한 문명의 첨단에는 항상 서슬 푸른 신무기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도 진행 중이고 인류 멸망의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안서절도사인 고선지 장군 또한 세계 제국을 꿈꾸는 당의 정책을 최전방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오히려 수도 장안(長安)의 현종은 양귀비의 품에서 벗어나질 못했으니, 제국의 건설은 고선지 장군의 두 어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인 그가 원흉인 당을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다. 고선지는 정녕 고구려인임을 포기했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공(戰功)을 배 아파한 상사가 “개창자를 씹어 먹을 고구려 노예놈, 개똥을 핥아먹을 고구려 노예놈”이라고 모욕을 해도 결코 고구려인임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선지의 생각은 무엇일까.
 고구려 멸망 80년. 당은 고구려 유민들이 끈질기게 국가재건운동을 벌이자 이를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인들을 오지로 내몰았다. 이때 고선지 아버지인 고사계(高舍鷄)도 안서지역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아버지가 장수였기에 고선지 또한 유능한 군인이 될 수 있었다. 군인만이 가장 빠르게 그리고 무리 없이 자신의 기반을 넓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고구려인이지만 중국과 대등한 문명을 열어간 고구려의 기상은 그렇게 쉽게 식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선지부대의 선봉은 고구려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영토확장은 당나라의 몫일지라도 진정한 승리는 고구려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석국을 비롯한 72개국을 복속시킨 이유였을까? 지장(智將)이기도 한 고선지의 생각은 또 있었을 것이다.
 사마르칸드의 아프라시압 궁전 터에서 발굴된 벽화에는 사마르칸드의 왕이 외국 사절단의 알현을 받는 장면이 있다. 그중에는 머리에 조우관을 쓴 두 명의 사절이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고구려인이다. 벽화의 주인공은 바르흐만 왕으로 650년에서 660년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고구려가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하며 초원로를 따라 돌궐인 투르크인과 상호 교통했음은 이미 알려져 있는데, 이때에도 고구려 사절은 초원로를 따라 왔지만 사정은 급박했다. 신라와 함께 협공하는 당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도 투르크와 연대하여 당을 협공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르크는 협조하지 않았고 고구려는 멸망했다.
 나라 잃은 유민이 당해야 하는 치욕을 참으며 젊은 고선지는 망국의 역사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함께 투르크인에 대한 믿음도 없었을 것이리라. 그 후 안서절도사가 되어 망국의 한을 하나씩 실천에 옮겼다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750년 석국을 정벌하기 몇 달 전, 걸사국인 사마르칸드를 먼저 평정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연유에서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즈베키스탄 과학아카데미부설 전통예술연구소의 아카데미크 르드벨라제 박사는 민우르크성터와 함께 ‘악테파(Ak-Tepa)’ 유적도 중요하다고 귀띔해준다.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악테파는 당시 귀족들의 저택이 있던 곳이다. 상류층이 살던 곳이라 왕궁 못지않은 시설과 함께 별도의 성을 쌓아 외곽방어선 역할을 겸했을 악테파를 찾았다.
 하지만 ‘황성옛터’라 했던가. 고선지 장군의 전위대에 의해 파괴되고 수백 년을 방치해 오는 동안 그 옛날의 영화는 간 곳이 없다. 5월임에도 따가운 햇살과 거친 바람이 주민들이 파헤친 구덩이의 먼지만을 뽀얗게 일으킬 뿐이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이 기쁨과 환희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쓰라림과 반성을 통한 새로운 다짐이라면 악테파에서도 그래야 할 것이다.
 고선지 장군은 석국 정벌뿐 아니라 돌기시도 응징하고 그 왕을 사로잡아 석국의 왕 투둔과 함께 장안으로 압송했다. 이로써 반당(反唐) 움직임을 보이던 주변국을 제압하고 서역경영에 힘쓸 즈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그것은 수도로 압송한 석국왕 투둔을 문신들이 살해한 사건이다. 대개 당에 복속한 왕에게는 별도의 직위를 주고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 관행인데, 어찌하여 그것도 포로인 왕을 살해했을까.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세 번의 약속을 어긴 것에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신의를 중시한다는 국가의 수도 한복판이라면 배신감에 찬 여론몰이식 사냥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슬람 국가들의 단결로 이어져 1년 후 탈라스전투에서 고선지 장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주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중국의 서역 경영에 치명타를 입히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고선지 장군을 필두로 세계제국으로 치닫던 당 문명도 이슬람 문명의 힘에 밀려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자리를 내주며 전성기를 마감해야 했으니 역사의 사필귀정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허우범 인하대 대외협력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