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수 절-수 지-화 허-자저르르르」 「낙양동천-」 장단을 청하는 불림에 반주가 시작되면 힘찬 도무(跳舞)로 한삼 자락 휘날리고, 우리네 세상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내는 걸죽한 소리와 사설(재담ㆍ덕담)이 이어지면 보는이까지 흥겹고 속시원한 탈놀이. 고구려의 무악, 신라의 처용무 등에 기원을 두고 이어져온 탈놀이는 음력 대보름이나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추석 등 명절과 경사때 밤새도록 한판 질펀하게 펼쳐져 서민들 신명을 돋워주던 대표적인 놀이였다. 탈놀이중에도 봉산탈춤은 명수들의 배역과 뛰어난 연기로 주위에 명성을 떨쳤고 강령탈춤과 함께 황해도 탈놀이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인천시 중구 동인천동 5에는 바로 이 탈춤을 60년 이상 춘 인간문화재 양소운여사(76ㆍ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 기능(사당ㆍ미얄ㆍ무당)보유자ㆍ☎772-4491)가 살고 있다. 현재는 봉산탈춤 한 종목 기능보유자(67년 지정)지만, 서북지방(강령ㆍ은율) 탈춤은 물론 악기 연주 등 전통무용과 국악 전반까지 두루 섭렵한 이 시대 몇 안되는 예인(藝人)중의 예인이다. 황해도지방 은율탈춤(중요무형문화재 61호)이 인천지역을 전승지역으로 해 지정(78년)되고, 현재까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 수 있는 것도 양여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해도 재령이 고향인 양여사는 11살때 탈춤을 배웠다. 소학교에서 집을 오가는 길 중간에 있었던 한 국악강습소에서 들려오던 장단소리에 넋을 빼앗겨 버린 어린 학생은 매일같이 그곳에 가 창문틈으로 춤사위와 가락을 보고 들으며 살며시 연습해보곤 했다. 밤길을 벗삼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꿈속에서도 춤동작과 장단만 떠올랐다.

 그런 그를 눈여겨보던 동네 유지의 도움으로 그는 정식으로 강습소 단원이 되어 마음껏 각 지방 탈춤, 검무, 활량무, 배뱅잇굿, 병신춤 등 무용과 소리를 배우게 되었다. 양반집안 귀한 딸이 광대들이나 추는 탈춤을 배운다고 모진 반대와 비난을 받았지만, 탈춤의 매력에 빠진 그를 빼내올 수는 없었다.

 하루 눈을 붙이는 시간은 2시간여. 밤이면 산으로 올라가 날이 샐때까지 폭포수밑에서 목청을 돋워 소리연습을 하고 시조를 읊조렸다. 그 순간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무서움도 잊을 수 있었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난 뒤에는 공부도 잘되었다.

 12살 탈판에 처음 나가 팔목중춤을 춘 것을 시작으로 그는 해주 택일정, 경암산밑 광장 등 곳곳에서 벌어지는 탈판에 나가 재능을 발휘했다. 개성 극장에서 열린 민속경연대회에서는 각 지방 출전팀을 물리치고 그의 팀이 최연소자인 그의 춤솜씨덕에 우승을 하기도 했다. 입과 입을 통해 그의 이름은 각지로 퍼져나갔다. 탈을 쓴 까닭에 그를 알아볼 수 없었던 부모들조차 가장 어린 것이 누구인지 그렇게도 춤을 잘추더라며 이야기 할 정도였다.

 결혼후에도 남편의 후원으로 활동을 계속했던 그는 서울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연백 인근의 청단, 연성리에서도 그곳 지역유지의 간곡한 요청으로 잠시 머물며 춤과 소리를 가르치고 공연을 했다. 『몸을 혹사해 목이 쉬고 꼼짝을 못할 지경인데도 관객들은 계속 내 공연을 보고싶어해요. 내가 좋아 한 일이지만 그럴 때는 왜 이것을 배웠나…서럽고 눈물이 나기도 하지요.』 웃고있는 가면뒤 애환을 누가 알 수 있을까.

 6ㆍ25로 말못할 고생을 하고 50년 중반 정착한 곳이 인천. 세상은 좁다고, 연고가 없던 인천 송림동에서 바로 그의 스승이었던 장양선선생의 후배 민천식씨(작고ㆍ봉산탈춤 기능보유자)가 무용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후학을 가르친 것을 계기로 그는 이후 무용학원을 열고 학생들을 계속 지도했다. 그 와중에도 서울을 오가며 강령탈춤을 더 익히고, 장귀영ㆍ장영수씨로부터는 은율탈춤을 배워나가는 등 우리 것 익히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령인 탓에 몸이 많이 불편하지만 지금도 그는 매주 월ㆍ수ㆍ금요일 인천 수봉공원에서 봉산탈춤을 지도한다. 과거 강습비 독촉도 못하고 오직 기예를 전수하는데 전념해온 그를 따르는 많은 제자들은 건강을 염려하지만 쉬면 오히려 몸이 아프다는 양여사. 가르치려하지 않았는데도 피를 물려받았는지 두 딸과 막내아들(은율탈춤보존회 차부회 사무국장), 어린 손자ㆍ손녀까지 춤과 소리에 두각을 나타내 마음 든든하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소중한 우리것을 제대로 알 때까지 거기에 미쳐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손미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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