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삼과 주윤발이 다시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영화 ‘방탄승’은 관객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그들이 누구인가. ‘영웅본색’ 시리즈로 소위 ‘홍콩 느와르’의 시대를 화려하게 개막했던 영웅들이 아니던가.
 그러나 성냥을 씹으며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사정없이 총알을 날려대던 킬러 주윤발의 냉소적인 모습을 이 영화에서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킬러 주윤발의 냉소주의적인 몸부림은 오우삼과 주윤발이 독해한 홍콩의 비유법이었다. 폭죽같이 터지는 총알들은 그 화려한 미장센 효과에도 불구하고 깊은 좌절감과 허탈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이안 감독과 함께 이루어낸 ‘와호장룡’의 우아한 율동과 철학적 깊이도 ‘방탄승’에서 찾기는 힘들다. 이 영화는 ‘홍콩 느와르’의 옛 명성을 잊지 못한 두 남자의 어설픈 미련 같다.
 1943년 티벳 사원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신통한 능력의 비전(秘典)이 있다. 무명승(無名僧) 주윤발에게 그의 스승이 비전을 건네 주며 60년 안에 비전을 지킬 후계자를 찾으라고 말한다. 비전의 절대권력을 탐한 나치 장교의 총에 무명승은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그로부터 60년 뒤의 미국. 미국에서 비전을 지킬 후계자를 찾아다니는 무명승과, 60년 동안 무명승을 추격해 온 나치 장교 일당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오우삼과 주윤발이 그 동안 구축해 왔던 그들만의 캐릭터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 영화는 ‘반지의 제왕’에서의 절대반지, ‘미션 임파서블’의 와이어 액션, ‘인디애나 존스’에서의 추격 모티브, ‘쿵후’에서의 동양적 신비주의 등이 어지럽게 인용되고 짜깁기된 작품이다. 배우들의 화려한 몸 동작과 만화적인 상상력은 가히 영화 ‘메트릭스’의 오마주라 할 만하다.
 홍콩의 중국 반환에 대한 무의식적 질병이 치유된 것일까. 이제 오우삼과 주윤발에게서는 세상에 대한 공포와 끝 모를 불안감이 포착되지 않는다. 홍콩을 떠나 할리우드에 안착한 두 남자의 버라이어티쇼는 믿지 못할 정도로 미국적인, 아니 국적 불명의 페이소스를 발산한다.
 미국 감독들이 동양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하고 신비화했던 시행착오를 두 중국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천연덕스럽게 재연한다. ‘방탄승’은 티벳을 신화 속의 가상 국가처럼 과장되게 묘사함으로써 티벳의 고유한 역사성과 현재성을 휘발시켜 버린다. 게다가 나치 잔당의 악마적 캐릭터화는 ‘인디애나 존스’의 망령을 다시 불러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런 의미에서 오우삼과 주윤발의 재회는 매우 불길하고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동양인이 미국적 시선을 내면화했을 때, 미국인이 동양을 타자화(他者化)한 것보다도 더 심각한 오리엔탈리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해준다. 인류를 지켜낼 수 있는 비법을 가진 티벳의 무명승이 미국의 두 젊은 남녀(남자는 소매치기이고 여자는 갱단 두목의 딸이다)를 후계자로 임명하는 것은 여러모로 씁쓸한 결말이다. 이들에게 인류의 미래를 맡기고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주윤발의 뒷모습은 ‘영웅본색’에서의 킬러의 외로움보다 훨씬 고통스럽게 다가온다.<박명진.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