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철 지난 베스트셀러 ‘타나토노트’와, 현재 베스트셀러 종합 순위 10위 안에 진입해 있는 앤디 앤드루스의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를 읽었다. 그것도 무척 흥미진진하게. 평소 베스트셀러를 향한 작지 않은 반감을 지니고 있건만, 두 베스트셀러에 남다른 흥미를 느낀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두 작품이 보여준 죽음(과 삶)에 대한 성찰도 그렇거니와, 그 죽음을 형상화하면서 동원한 문학적 상상력이 경직될 대로 경직된 내 사고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일찍이 SF 영화들을 통해 어지간히 익숙해졌음에도, 위 두 작품이 펼쳐 보이는 상상의 세계는 그야말로 허를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우주 탐사도 (내겐)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거늘 ‘영계 탐사’를 맘껏 펼치고, 자살을 감행하는 40대 중반의 한 남자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부터 대천사 가브리엘에 이르는 일곱 현자를 만나 일생일대의 선물-책의 원제는 'The Traveller's Gift'다-을 받는 ‘영계 여행’을 펼치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만약 현실적 개연성ㆍ설득력 따위의 잣대에 집착한 채 위 베스트셀러들을 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그랬더라면 십중팔구 도중에 그 책들을 집어 던져 버리고 말았으리라. 가당찮은 헛소리잖아, 하면서. 그렇지 않은 건 반복컨대 문학적ㆍ예술적 상상력에 한없이 매료되어서일 터.
 문득 한국 영화를,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그 중에서도 오늘 개봉되는 ‘내츄럴 시티’(감독·민병천)를 떠올려본다. 저들 문학 텍스트들과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영화를 평가하는 평자들의 진단에 도무지 영화적 상상력이 발견되지 않는다. 상상력은커녕 최소한의 예우도 보이질 않는다.
 2080년이라는 먼 미래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내츄럴 시티’의 내러티브적 전제는 무단이탈 사이보그 제거 요원인 주인공 R(유지태 분)이 절대 고독 속에서 허우적대다 일주일 뒤면 수명이 다할 사이보그 댄서 리아(서린)에게 첫 눈에 반하고, 그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받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전제는 극적 개연성 여부를 떠나 전제로서 인정, 수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적잖은 이들이 그 전제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림은 좋은데 이야기가 영 아니라고 투덜대며 비판의 화살을 쏘아 댄다. 나 역시 영화의 극적 호흡이 썩 맘에 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제를 의심하진 않는다. 이야기 자체가 엉망이라는 진단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극적 호흡 내지 리듬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니까. 그렇다면 이 땅의 숱한 평자들은, 평론가들이건 저널리스트들이건 혹은 관객들이건 간에, 우리 네 영화의 그 알량한 상상력에도 못 미치고 있는 건 아닐까….   전 찬일(영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