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일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플라스틱 트리’를 보고 난 느낌은, 뭔가 간이 잘 안 맞는 듯한 고급 요리를 먹은 느낌이다. 시나리오와 연출의 진지함, 세 명의 남녀 주인공들의 열연, 배경 음악의 노련함. 그러나 ‘시나리오 뱅크’ 공모전 당선작인 김성실의 시나리오는 지나치게 문학 청년적인 무게를 잡고 있으며, 어일선 감독의 연출은 안정감과 도발성 중간 언저리에서 서성대고 있다. 게다가 조은숙, 김인권, 김정현의 연기는 의욕만 넘친 상태에서 무대 위에 올라선 신진 배우를 연상하게 한다.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 자리잡은 누추한 이발소. 이곳에서 이발사 ‘수’(김인권)와 퀵 서비스 직원인 ‘원영’(조은숙)이 동거한다. 심성이 착한 ‘원영’은 발기 불능의 ‘수’의 사랑에 만족해하며 살아간다. 이 늪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동거에 ‘수’의 어릴 적 친구 ‘병호’(김정현)가 느닷없이 끼어 든다. 남자 구실은 못하지만 섬세하고 차분하고 성실한 ‘수’와, 거칠고 무례하고 파렴치하기까지 한 ‘병호’는 ‘원영’이 욕망하는 두 개의 세계이다. 한 남자는 자상하지만 말초적인 섹슈얼리티가 없고 다른 남자는 무책임하지만 터프하다.
 뻔한 삼각관계. 그러나 세상에서 버림받은 세 명의 젊은이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정신적인 상처들을 세밀하게 파고 들어간다면, 의외의 고급스러운 심리 드라마가 탄생할 법도 했다. 미장원을 경영하던 ‘수’의 어머니는 아들 머리를 여자애처럼 기르게 강요한다. 그녀는 마침내 미쳐 바다에 빠져 죽고 ‘수’는 어머니의 미장원을 물려받아 이발소를 차린다. 머리카락과 가위. 섹슈얼리티와 거세공포를 의미하는 이 상투적인 비유어들은 ‘원영’이 왜 그토록 탐스럽고 긴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는지 암시한다.
 퀵서비스 일을 하는 ‘원영’은 남자 동료들로부터 끊임없이 성희롱을 당하고 모욕당한다. 그녀는 이 사회 누구로부터도 존경받지 못한다. 외양어선을 타기 위해 흘러 들어온 ‘병호’는 사랑 따위는 절대로 믿지 않는 염세주의자이다. 이들 세 명은 각자의 상처를 가슴에 안고 늪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수’의 과거, ‘원영’의 현재, 그리고 ‘병혁’의 무시간성(無時間性)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맺지 않은 상태에서, 이발소 바닥에 나뒹구는 머리카락처럼 따로 논다. 따라서 ‘원영’에 대한 ‘수’의 애널섹스, ‘원영’을 강간하는 ‘병호’의 왕성한 섹슈얼리티는 음식 주제와 상관없는 양념처럼 겉돈다.
 섬세하고 치밀한 캐릭터 구축이 이 영화의 생명선이었을진데, 세 명의 젊은 배우들은 지나치게 들떠있거나 가라앉아 있다. ‘송어’에서의 김인권의 광기(狂氣)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의 조은숙의 황량한 영혼도 이 영화 속에서는 겨울 바다 바람에 꽁꽁 얼어버렸다.
 그러나 ‘인공나무(플라스틱트리)’만을 탐욕스럽게 쫓고 있는 작금의 영화계와 관객들의 취향을 염두에 둔다면, 비록 원숙하지는 않지만 패기만만한, 이들 젊은 작가, 감독, 배우들의 가능성을 계속 지켜보아야 할 듯하다.
 
  박명진(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