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가족’은 두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 배우 문소리, 황정민이 임상수와 만났다는 사실, 그리고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눈물’을 거쳐온 임상수의 집요함이 ‘바람난 가족’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문소리는 이창동 사단에서 ‘박하사탕’처럼 청순한 여공(女工)으로, 삼류 인생에게 ‘오아시스’를 선사하는 장애 여성으로 살아왔다. 다시 말해 그녀는 80년대라는 무거운 옷으로 포박되거나, 사회적 편견에 짓눌린 육체성을 질질 끌고 다니다가, 드디어 그 거추장스럽고 칙칙한 겉옷을 훌훌 벗어 던진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의 덩어리, 길들일 수 없는 아내 은호정으로 다시 태어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는 순진하지만 약간 모자라는 드러머 강수로, ‘로드무비’에서는 마초적인 동성애자 대식으로 등장했던 황정민은 ‘바람난 가족’에서 앞의 두 캐릭터를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남편 주영작 역할을 맡는다. 두 배우의 만남은 임상수 영화의 행보에 날카로우면서도 강렬한 흔적을 남긴다.
 위악적(僞惡的)이기까지 한 임상수 영화의 뻔뻔함은 문소리와 황정민이 새겨놓은 좌표 위에서 다시 빛을 발한다. ‘바람난 가족’에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 성욕을 느끼지 못한다. 남편은 젊은 애인과 격렬한 섹스를 하고, 아내는 옆집 사는 고등학교 중퇴생(봉태규)과 장난 같은 사랑을 나눈다. 이 부부가 입양해 온 아들은 자신이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시어머니(윤여정)는 알콜 중독 후유증으로 간암 말기에 처한 그녀의 남편(김인문) 대신 동창생과 정을 나눈다. 이들은 형식상 ‘가족’으로 분류되지만 실질적으로 ‘가족’이 아니다.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들을 ‘가족’이라 불렀기 때문에 ‘가족’이 된 것이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시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특별히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시아버지가 죽자마자 시어머니는 재혼하여 떠나버리고, 남편은 애인과의 섹스를 굶주려 한다. 아내는 아들의 급작스런 죽음 뒤에 옆집 총각과 섹스를 나눈다. ‘가족’은 결코 이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송능한의 ‘세기말’이 인간의 좌절을 심문하고 그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희미한 구원을 탐색했다면, ‘바람난 가족’은 이를 구경하고 있을 뿐이다. 임상수는 도덕주의자나 계몽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서글프고 쓸쓸하다. 그의 영화들이 감싸고 있는 뻔뻔함 속에는 아주 민감한 상처들이 움츠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람난 가족’에서 남편과 아내는 완전하게 자유로운 영혼은 아니다. 입양해온 아들이 납치되어 죽은 뒤, 남편은 아내와의 결합을 꿈꾸고 있으며, 아내는 옆집 총각의 애를 밴 채 남편과 갈라선다. 남편은 아내가 필요하고 아내는 자식이 필요하다.
 물론 임상수는, 한국 영화에서는 매우 특이하게, 여성 캐릭터를 가부장주의에 귀속시키지 않는 감독이다. 아내와 그녀의 시어머니는 기존의 ‘가족’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족’을 생산한다. 이것은 ‘시할아버지→시아버지→남편’으로 이어지는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란이다. 그러나 임상수가 제시하는 대체가족은 모호하다. 가족 이외의 대안은 아직 없는 것일까.<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