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택에게 사나이들의 삶은 ‘사각의 정글’에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그 어떤 비장감을 뜻한다. 이때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각의 정글’은, 소년이 사나이로 거듭 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입사식(initiation)의 공간이다. 입사식, 또는 성인식은 일련의 고된 시련을 통해 성인 공동체의 방식과 관습을 익힘으로써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의식이다. 소년들은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여러 가지 시험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
 데뷔작 ‘억수탕’(1997)이 부산 목욕탕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에피소드들을 코믹하게 다루었다면, ‘닥터K’(1999)는 감독 자신의 의과대학 시절을 바탕으로 병원 진료와 관련된 미스터리를 판타지로 그린다. 초기의 두 작품 다 흥행에서 참패하고 말았는데, 곽경택적인 영화 세계를 만나기 위해서 관객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친구’(2001), ‘챔피언’(2002), ‘똥개’(2003)와 같은 일련의 남성 영화에 와서야 그의 독특한 색깔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곽경택 영화의 소년들은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기 위해 피 튀기는 전투를 벌인다. 재미있게도 뒤의 세 작품들은 주인공의 소년 시절에 대한 회고담으로부터 내러티브를 풀어나간다. 세 영화는 폐타이어 튜브를 타고 바다에서 놀던 네 명의 소년들, 바다를 보며 챔피언을 꿈꾸던 소년, 어머니의 상여 행렬에서 철없이 굴던 소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 소년들은 사나이가 되기 위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입사식을 치러야 하는데, 조폭과의 칼부림이건 사각 링에서의 주먹다짐이건 동네 깡패와의 패싸움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모두 이 사회의 당당한 전사로 승인 받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외로운 승냥이들이다.
 ‘친구’와 ‘챔피언’에서 보여준 바 있던 과도한 마초이즘(machoism)은 ‘똥개’에 와서 어깨의 힘을 약간 뺀 듯이 보인다. 그러나 ‘똥개’의 철민(정우성)은 곽경택이 개발한 또 하나의 사나이일 뿐이다. ‘친구’의 동수(장동건)나 ‘챔피언’의 김득구(유오성)처럼 극단적 투쟁을 벌이는 비극적 영웅상은 아니지만, 똥개 철민은 나름대로 대한민국 사나이의 또 다른 남성적 매력을 발산시킨다. “내는 한 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다.”라는 똥개 철민의 신조는 그대로 이 나라 사나이 정신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세상에 대한 감독의 시선이 따뜻해진 것일까. 가족의 끈끈한 정이 존재하지 않던 그의 영화에 가족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다. 무뚝뚝하긴 해도 수사과장인 아버지(김갑수)는 아들과의 끈을 놓지 않는다. 게다가 아버지가 경찰서에서 데려온 정애(엄지원)는 퍽퍽한 두 남자의 세계에서 가정주부의 빈 공간을 채워준다. 정애는 똥개와 똥개 아버지를 온전한 가족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감옥 면회실에서 아버지가 철민에게 부정(父情)을 고백함으로써 헛돌던 부자 관계를 회복하고, 철민이 유치장에서 깡패 두목과 결투해 승리함으로써 훼손된 남성성을 회복한다. 아버지와 아들, 이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잃었던 것을 되찾을 뿐이다. 이들이 평화를 구가하기 위해서는 한 명의 여성, 정애가 변화되어야 한다. 남성적 영웅 서사에 대한 곽경택의 미련이 희미해지기까지 아직 관객의 인내가 필요할 듯하다. <박명진.영화평론가>


이번 주 부터 영화면 칼럼은 영화평론가이자 중앙대 교수인 박명진씨가 새 필진으로 참여합니다. 박명진씨는 ‘박명진의 영화읽기’란 코너를 통해 2주에 한번씩 독자들을 찾아갈 예정입니다. 박명진씨는 1959년 인천 출생으로 제물포고,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와 대학원(박사과정)을 거쳐 현재 중앙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1998년 ‘월간문학’에 희곡부문으로 등단했으며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에 당선된 바 있습니다.